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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3랩 에리카 정 대표, 아름다운 완벽주의자, 성공신화 쓰다

대학 재학 중 미국 유학 한국기업 뉴욕 지사장 10년 남편과 화장품 가게로 출발 소매체인, 제조업까지 확장 03년 고가 브랜드 3랩 론칭 3년 만에 고급 백화점 입점 광고비 안 쓰고 품질로 승부 작년 매출액 4천만불 달성 사진 속 그녀는 천상여자였다. 단아함과 여성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그러나 웬걸, 직접 만나보니 그녀가 이미 전화상으로 선전포고(?)했듯 대장부도 이런 대장부가 없다. 바로 화장품업계에서 독보적인 성공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는 3랩(3LAB) 에리카 정(61) 대표다. 대화가 시작되고 10분도 채 안 돼 그녀의 카리스마는 빛을 발했다. 좋고 싫음이 분명한 화통한 성격에 타고난 친화력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본새는 그녀가 어떻게 지금의 자리까지 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대화 도중 간간히 튀어나오는 대구 사투리가 매력적인, 이 타고난 사업가를 전나무 숲이 우거진 그녀의 뉴욕주 주말 별장에서 만나봤다. #대구 아가씨, 뉴요커 되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계명대 작곡과 재학 중이던 1979년 일리노이주 소재 어거스타나 칼리지로 유학 와 정치학과 미술을 복수 전공했다. 미술 공부를 시작한 것은 한국 추상화가의 개척자이며 계명대 미술대학장을 지낸 부친 고(故) 정점식 화백의 영향이 컸다. "한국에서 음대에 간 건 졸업 후 시집 잘 간다고 믿었던 어머니의 반 강요 때문이었고(웃음) 저는 어려서부터 꿈꿨던 좁은 한국을 떠나 보다 더 넓은 세계에서 살고 싶어 부모님을 졸라 오빠가 유학 중이던 미국으로 왔죠." 대학 졸업 후인 1985년 그녀는 뉴욕 리먼칼리지에서 정치학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객지에서 혼자 지내는 혼기 꽉 찬 막내딸 걱정에 모친은 그녀를 한국으로 불러들였고 1986년 귀국한 그녀는 신라호텔 공채 경력직으로 입사, 1년6개월간 VIP담당자로 근무했다. 이후 1987년 연세대 행정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던 중 동국방직 뉴욕 지사장직 제안을 받고는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1988년 어느 봄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며 세계 각국의 패션 관계자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그러면서 언젠가 꼭 성공해 저들처럼 자가용 비행기를 타며 살고 싶다는 꿈을 꿨던 것 같아요.(웃음)" #그녀의 성공시대 1990년 그녀는 현 잉글우드랩 데이비드 정 대표와 결혼했다. 1년 뒤 부부는 뉴저지에 화장품전문점 '모나스'를 오픈했다. 부부의 타고난 비즈니스 수완 덕분에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인수당시 하루 매출 500달러이던 것이 6000달러로 껑충 뛰어올랐다. 여세를 몰아 1년 뒤 부부는 뉴욕과 LA에 '코스메틱 월드'도 오픈했다. 그러다 1997년 데이비드 정 대표가 '엘리자베스 아덴'의 한국 총판권을 따게 되면서 부부는 한국행을 결심하고 그녀는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한국에 가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져 1년 뒤 막대한 손실만 입은 채 부부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이후 심기일전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든 그녀는 2000년 온라인 화장품 쇼핑몰 '마이디바닷컴'을 론칭했다. 주로 한국 고객들을 상대로 화장품을 배송해 줬는데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해외 직구의 원조였던 셈. 쇼핑몰은 대히트를 쳤고 이를 계기로 그녀는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자체 브랜드 론칭에 착수, 2003년 3랩을 선보였다. 제조는 뉴저지 소재 한 화장품 제조공장에 맡겼고 판매는 '코스메틱 월드'에서 시작했다. 당시 3랩 제품의 소매가는 100~400달러 선. 처음 하는 브랜드 사업인데 안전하게 중저가 브랜드부터 론칭할 생각은 안했냐는 질문에 그녀가 호탕하게 웃는다. "그러게요. 수익만 놓고 보면 당연히 중저가를 만드는 게 낮죠. 그런데 뭘 하나 하더라도 완벽하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보니 론칭 전부터 제가 쓰고 싶은, 세상에서 최고로 효과 좋은 화장품을 만들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웃음)" 론칭 후 반응은 좋았다. 여타의 광고 없이 오로지 샘플로만 승부했음에도 이 신생 브랜드는 입소문을 타고 불티나게 팔려 나가 매장 한곳 당 연 매출액이 60만달러를 넘어설 정도였다. #이 여자가 사는 법 2005년 부부는 화장품 제조업체인 '잉글우드랩'도 설립했다. 1년 뒤 3랩은 뉴욕 삭스핍스애비뉴 백화점에 입점했고 이듬해엔 바니스 전국 매장에, 2009년엔 노스트롬의 전국 22곳 매장에도 3랩 간판을 걸 수 있었다. 또 2006년 독일을 시작으로 영국, 홍콩, 두바이, 러시아 등 18개국에 진출했다. 이처럼 3랩이 론칭 3년 만에 고급 백화점은 물론 해외시장까지 진출 할 수 있었던 것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입소문 공이 컸다. 당시 제니퍼 로페즈, 힐러리 스윙크, 파라 포셋 등 유명 배우들이 3랩 'WW크림'의 열혈 팬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류사회 '부잣집 사모님'들의 이목을 잡아 끈 것이다. 이후 3랩은 수퍼세럼, 수퍼크림, H세럼 등 연이은 히트작을 내놓으며 매년 20%이상의 매출신장을 보이며 성장해 지난해엔 연 매출 4000만달러를 돌파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늘 꽃길만 걸어 온 것은 아니다. 믿었던 직원들에게 배신을 당해 큰돈을 날리기도 수 차례였고 2005년 한국에 진출해서는 '가짜 명품' 논란에 휘말리며 방송에까지 오르내리는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사업을 하다 보면 별별 사람, 별별 일을 다 겪게 돼요.(웃음) 그러다보니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공부를 시작했고 그 길에서 불교를 만나게 됐죠. 그러면서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사람을 보는 눈이 생긴 것 같아요.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요.(웃음)" 처음엔 그녀가 불자가 된 것을 탐탁지않게 여겼던 사춘기 아들 피터씨는 NYU 국제정치학과에 진학해 명상 수업을 듣는 등 수행에 관심을 갖다 5년 전 출가해 백담사를 거쳐 얼마 전 김천 직지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아무리 불심 깊은 신자라 해도 외아들의 출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구도자의 삶을 살겠다는 데 말릴 이유가 없죠. 그래서 남편이나 저나 모두 응원 중입니다.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게 인생인데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주변 사람들에게든 좋은 에너지를 나눠주며 살고 싶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젊은이들에게 좋은 멘토가 되고 벤처 기업도 설립해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게 꿈이기도 합니다." 오호라, 그녀 이미 평상심 한가운데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상심이란 본디 원래부터 고요한 마음이 아닌 흔들리는 물결 위에서도 고요한 것이니 그녀 즉심즉불(卽心卽佛, 마음이 곧 부처)의 경계 어디쯤에서 서성이는 것은 아닐는지. 그 경계 무장무애 하니 깨달음이 지척이 아니겠는가.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4-15

[인물 오디세이] 현대차 미주 디자인스튜디오 최수민 매니저, 상상 그 이상을 디자인하다

중2때 뉴욕 가족이민 독일유학 후 유럽서 활동 포르셰·오펠·폭스바겐 거쳐 05년 미국 BMW로 와 2012년 현대차 입사 ‘이오니크’ 론칭해 주목 2015년 고성능 콘셉트카 독일 오토쇼서 선보여 극찬 대개 직업에 대한 판타지는 실제 그 직함을 가진 이를 만나는 순간 십중팔구는 깨지기 마련. 그러나 이 불문율을 보기 좋게 배신한 이가 있다. 현대자동차 미주 디자인스튜디오 최수민(53) 크리에이티브 매니저다. 180cm가 훌쩍 넘는 큰 키에 청바지와 진녹색 스웨터, 스니커즈를 무심한 듯 시크하게 매치한 그에게선 한 눈에도 디자이너만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게다가 지천명을 넘겼다고는 믿기지 않는 동안까지. 그러나 이보다 더 마음을 잡아 끈 것은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열정이었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로미오의 눈빛이 이러하려나. 차 이야기만 나오면 볼 빨간 사춘기 소년마냥 설렘 한 가득이다. 듣는 이까지 덩달아 그 설렘이 전염될 것만 같았다. 포르쉐와 폭스바겐, BMW 등 세계 명차 브랜드를 거쳐 6년 전부터 현대 차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그를 현대차 어바인 스튜디오에서 만나봤다. #소년, 차와 사랑에 빠지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차라면 껌뻑 죽었다. 또래 친구들이 만화책에 빠져 있을 때 소년은 서울 청계천 헌책방에 앉아 미국 자동차 전문잡지를 뒤적였고 방과 후엔 동네 폐차장을 놀이터 삼아 자동차 부품 구경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당시 국산차로는 현대 포니가 유일했는데 포니를 몰던 택시기사님들이 너무 멋져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어린 시절 제 장래희망은 늘 택시기사였습니다.(웃음)” 이처럼 평범한 유년생활을 보내던 중 농구 국가대표 선수였던 부친이 사망하면서 가족은 1978년 뉴욕으로 이민 왔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어린 그에게 이민생활이 녹록할 리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해온 농구 덕분에 그는 퀸즈 소재 고교 농구팀 창단 역사상 최초의 아시안 선수로 발탁될 만큼 화려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고교졸업 후 1985년 뉴욕 소재 프랫인스티튜트에 진학,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잠시 가구 디자이너로 일하다 한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1991년 서울로 가 쌍용자동차 디자인팀에 입사했다. “당시 회사가 벤츠와 함께 합작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는데 벤츠 책임자가 제게 자동차 디자인 공부를 제대로 해보라며 독일 유학을 권유했죠.” 1년간의 유학준비 끝 그는 1994년 독일 포르츠하임대학교 대학원 자동차디자인학과 준석사(post graduate)과정에 입학했다. #세계를 무대로 승승장구 방학 때도 학교에 남아 공부할 만큼 악착스레 학업에 매달린 덕분에 졸업 무렵엔 독일 유명 자동차 제조사들의 인턴십 제안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중 오펠과 포르쉐에서 인턴쉽을 마친 그는 1995년 포르쉐에 계약직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1년 뒤 오펠사가 그에게 대학원 학비전액 후원 등 파격적인 제안을 해와 고심 끝 이직했다. 회사의 후원으로 1996년 그는 패서디나 아트센터 대학원 자동차디자인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시작해 2년 뒤 학위를 취득했고 쌍용차 후배인 아내 김민경(46)씨와 결혼 했다. 이후 독일 프랑크푸트르로 건너가 오펠 본사에서 2년6개월을 근무하면서 그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특히 그가 디자인한 오펠의 5도어 ‘아스트라 해치백’과 스포티하면서도 실용적인 ‘벡트라 왜건’은 큰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2001년 그는 폭스바겐이 야심차게 추진해 바르셀로나 인근 소도시에 설립한 어드밴스드 콘셉트 스튜디오로 자리를 옮긴다. 그 스튜디오는 당시 자동차 디자이너들이라면 누구나 입사하고 싶어 하는 꿈의 직장이었는데 폭스바겐사는 그와 오펠이 체결한 5년 근무계약을 지키지 못해 발생한 위약금까지 물어줄 만큼 그의 영입에 공을 들였다. 그곳에서 수퍼바이저 디자이너로 근무한 그는 2001년 북미 오토쇼에서 호평 받은 크로스오버 차량인 ‘마젤란’을 비롯해 폭스바겐 자회사인 아우디의 수퍼카 R8, 부가티 쿠페 등을 디자인해 주목받았다. 그리고 2005년 그는 캘리포니아 사우전드오크스 소재 BMW 미국 디자인스튜디오로 자리를 옮겨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근무했다. 2000년대 중후반 마니아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고성능 차량 X5M과 X6M, 미니 등이 그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한국차에 대한 오랜 꿈 이처럼 커리어에 있어 황금기를 구가하던 2012년 그는 돌연 현대차로 이직한다. 그의 상사였던 BMW 디렉터가 미주 현대차로 자리를 옮기며 그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해 온 것. “좀 고민을 했죠. 그러다 마지막 커리어를 한국 회사와 함께 하는 것도 의미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유년시절 포니를 보며 막연하게 꿨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죠.(웃음)” 현대에 와서도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계속됐다. ‘프리우스 킬러’라는 슬로건을 내건 아이오닉(IONIQ)이 지난해 출시돼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2015년엔 프랑크푸르트 오토쇼에서 콘셉트카 ‘N 2025 비전 그란투리스모’를 선보여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원래 그 모델은 소니 플레이스테이션과 공동제작한 게임용 레이싱카가 원조인데 최근 현대가 론칭한 고성능 브랜드 N의 방향성과 개발잠재력을 보여주기 위해 실제 모델로 제작한 거죠. 예산만도 15억원이 투자됐고 수작업 공정까지 만만치 않은 프로젝트였죠.” 이 콘셉트카가 오토쇼에서 베일을 벗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현지 관계자들은 물론 영국 유명 오토매거진 ‘톱기어’ 등 전문가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전문가들의 극찬보다 더 좋았던 건 한국의 자동차 마니아들의 호평이었어요. 한국에서 이런 차가 탄생해 너무 감격스럽다는 평가들을 보니 너무 뿌듯했죠.” 24시간 자동차 생각으로 가득 찬, 열정으로 똘똘 뭉친 이 남자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N브랜드 개발에 박차를 가해 고성능 차 개발에 헌신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한국 차라 하면 값싸고 대중적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대한민국 국민과 전 세계 한인들이 자부심을 가질만한 탁월한 고성능 차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소울이 깃든 차 말입니다.” 그에게 자동차란 꿈이며 종교라 했다. 30년 세월 그 바닥에서 잔뼈 굵으면 지겨울 법도 한데 차에 대한 열정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천재 화가 파울 클레는 말했다.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라고.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 그가 꿈꾸는 차가 언젠가 그 베일을 벗고 우리 앞에 서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 오래지 않아, 위풍당당하게.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4-08

[인물 오디세이] 나눔 실천 앞장서는 이의진씨 "나누는 삶이 내 행복의 원천"

한국서 잘나가던 사업가 IMF때 망해 무일푼 LA와 청소·식당·목수 헬퍼 전전 6년전 LA에 분식집 오픈 어려운 이웃·노숙자 위해 작년 한해만 1만불 기부 "죽을 고비 넘긴 인생 이웃 도울 수 있어 행복"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치른 고희(古稀)를 목전에 둔 사내의 순수한 마음이라니.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 마음이란 게 누구나 한 번쯤 삶의 고비를 겪으며 다짐했던 '언젠가 지금의 나와 같은 어려운 처지에 처한 이를 보면 꼭 돕겠다'는 일견 평범한 결심이라는 걸 알게 된다. 다만 대부분의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리는 걸 그는 기어코 지켜내고 있는 것일 뿐. 바로 이의진(68)씨다. 롤러코스터처럼 부침 심한 LA살이 20년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는 그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봤다. #잘 나가던 사업가에서 가난한 이민자로 부산에서 나고 자란 그는 일찍 부모님을 여위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건설현장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1982년 그간의 경험을 밑천삼아 건설 사업에 뛰어들었다. 주로 4~5층 규모의 상가 건물이나 주거용 빌라를 시공해 팔았는데 당시 부동산 경기 붐을 타고 사업체는 성장가도를 달렸다. 덕분에 90년대 중반 그가 소유한 부동산만도 빌라와 상가 등 10여 채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역시 1997년 터진 IMF사태를 비껴갈 순 없다. 공들여 추진한 30억 규모의 공사 계약 건이 은행융자 불발로 엎어졌고 IMF로 일자리를 잃은 세입자들의 앞 다퉈 전세금을 빼달라는 독촉전화가 이어졌다. "당시엔 제 정신이 아니었죠. 그래서 모든 부동산과 재산을 처분하고 아내에게 살집 하나 간신히 장만해 주고 무작정 서울로 갔어요. 죽을 각오였죠." 그리곤 다음 날 아침 그냥 무작정 인천공항으로 가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항공권을 끊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은 620달러가 전부였다고. "당시엔 삶의 의욕이 없었어요. 그냥 무조건 한국을 뜨고 보자는 생각뿐이었죠." LA공항에 도착해 한인택시를 잡아 탄 그는 택시 기사의 소개로 월 400달러짜리 LA한인타운 하숙집에 짐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야 세면도구와 속옷이 든 배낭 하나가 전부였다. 1998년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산전수전 LA살이 20년 이후 용접공 보조로, 목수 헬퍼로도 일했지만 기술이 없다보니 번번이 잘리기 일쑤였고 결국 하숙비를 내지 못해 쫓겨나게 됐다. 이후 LA인근 소도시를 전전하며 식당 일에 하우스 청소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아내도 데려왔다. "한 2년쯤 그렇게 일했는데 정말 힘든 시간이었죠. 약속한 월급을 못 받기도 하고 인격적인 모독도 비일비재했으니까요. 같은 한인들끼리 그러는 게 더 화나고 야속했습니다." 이후 우연찮게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그간의 힘든 시간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방송이 나간 후 일자리를 알선해주겠다는 청취자들이 온정이 답지했다. 그래서 그는 LA한인타운 소재 아파트 매니저로 취직할 수 있었고 아파트도 제공받았다. 덕분에 한국에 있는 아들과 딸도 데려 올 수 있었다. "다시 LA한인타운에 정착하곤 정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일자리를 주겠다는 이들이 생겼고 응원과 격려도 아끼지 않으셨죠." 가족들은 재기를 위해 힘을 합쳤다. 온 가족이 돈을 벌기 시작하니 금세 돈이 모였단다. 덕분에 2002년엔 LA베벌리센터 인근에 작은 샌드위치숍을 인수했고 그해 LA한인타운에 주택도 장만할 수 있었다. 주택을 리모델링해 하숙 사업을 시작했고 아들은 햄버거 가게를 열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아들의 사업에 문제가 생기면서 사업체와 집까지 날린 그는 다시 아파트 매니저로 취직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다시 열심히 일한 그는 2012년 LA한인타운에 '김밥천국'을 오픈할 수 있었다. 2016년엔 토런스에 2호점도 오픈해 딸네 부부에게 맡겼다. 그리고 최근 그는 LA점을 팔고 현재는 딸네 부부의 식당일을 도와주고 있다. #나누면 행복 두 배 이처럼 평범한 식당 주인이었던 그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지난 2016년 연말 본지에 노숙자들을 위해 써달라며 2000달러를 기탁하면서다. "어휴 정말 부끄러웠죠. 그저 할 일은 한 건데요 뭘. 그 무렵 중앙일보에 게재된 노숙자 심층기사를 읽고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그 사람들도 그렇게 되고 싶어선 된 게 아니거든요. 제가 겪어봐서 그들의 사정을 너무 잘 아니까요." 순간 그의 눈가가 붉어지더니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눈물의 의미를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저 지난했던 20년 LA살이가 주마등처럼 지나간 탓이리라 짐작만 해 볼뿐. "죽을 생각까지 했던 제게 지금의 삶은 보너스죠. 게다가 많은 한인들의 도움으로 지금에 이르렀으니 저도 보답하는 의미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며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의 기부와 이웃돕기는 하루아침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아파트 매니저로 일할 땐 형편이 어려워 쫓겨나게 생긴 세입자들을 위해 렌트비를 대신 내주고 식료품까지 사 들려줘야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었단다. 또 식당 앞에 노숙자라도 오면 입던 옷을 벗어주는 건 물론 다음날 집에서 이불까지 챙겨왔다고. 이후 식당 사업이 자리 잡으면서는 한인사회 크고 작은 봉사단체에 기부를 해왔고 작년 봄엔 한국에서 입양한 7남매를 키우다 어려운 사정에 처한 김영란씨 관련 본보 기사를 읽고 2000달러를 쾌척하기도 했다. 그렇게 기부한 돈이 작년 한해만 1만달러가 넘는다. 그리고 지난 1월에도 노숙자들을 위해 2000달러를 본지에 쾌척했고 조만간 1만달러를 또 기탁할 예정이란다. 도대체 무엇일까. 부침 심했던 인생인 만큼 만일을 대비해 쌈짓돈이라도 모으려 드는 게 인지상정일터인데 기부라니. "힘든 이들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될 수 있다 생각하면 얼마나 뿌듯한데요. 그래서 요즘은 돈 버는 것보다도 누군가를 도와주려 돈 쓰는 게 훨씬 더 행복합니다." 그에게 물었다. 행복하냐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행복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요 근자에 자신의 행복을 이토록 확신하는 이를 본적이 있었던가. 돈과 명예가 넘쳐나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이들조차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불안에 저당 잡혀 사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이 김밥집 사장님의 확신은 묘한 힐링을 건넸다. 톨스토이의, 아니 인류의 오래된 물음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이 스치는 순간이었다. 단언컨대 유레카.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4-01

[인물 오디세이] LA한인타운 시니어커뮤니티센터 이영송 이사장, 인생 최고의 황금기는 지금부터다

작년 센터 이사장 취임 활성화 위해 동분서주 "은퇴 후 인생 후반전 도전하며 행복 찾고파" 인생이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닌 경험해야 할 여정임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일까. 삶의 힘든 고비에서도 서두르는 법 없이 침착했고 길 떠난 소년의 유쾌함마저 엿보였다. LA한인타운 시니어커뮤니티센터(이하 시니어센터) 이영송(74) 이사장이다. 잘나가는 치과전문의로, 사업가로, 또 한인사회 유명인사로 어느새 40년 세월이지만 꽃길만 즈려밟는 인생이란 있을 수 없듯 그 역시 행복과 시련을 들실 날실 삼아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희로애락 속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건 아닌 인생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손에 쥔듯 했다. 그 지혜를 발판삼아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그를 시니어센터에서 만나봤다. #잘 나가는 치과전문의 되다 평안북도 태천 출생인 그는 한국전쟁 통 유년시절 대부분을 대전과 경북 경산 등지에서 피란생활을 하며 보냈다. 전쟁이 끝난 후 내과의였던 부친은 서울 후암동에 병원을 개원했고 그는 1963년 서울대 치대에 입학했다. "진로를 결정하는 데 아버지의 영향이 컸죠. 피란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는 늘 의사가 되면 밥은 안 굶는다고 하셨거든요.(웃음)" 대학 졸업 후 세브란스 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친 그는 병원 후배였던 아내와 함께 1975년 LA로 왔다. 이듬해 USC 치대에 입학해 보철전문의가 된 그는 1979년 가을 이스트LA 위티어에 병원을 개업했고 1981년부터는 USC 치대 임상 조교수로도 6년간 근무했다. 병원은 오픈과 동시에 문전성시를 이뤘다. "치대 시절 제 별명이 골드 핑거였어요.(웃음) 개원 후 아프지 않게 치료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환자들 소개로 베이커스필드, 롱비치에서까지 환자들이 몰려들었죠." 당시 그의 월수입은 5만달러를 넘어섰고 개원 두 달 만에 그는 패서디나에 25만달러짜리 저택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83년 16유닛 규모의 투자용 아파트 매입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부동산 투자에 뛰어들었다. "대학생 때 부친께서 후암동 3층집을 제게 상속하셔서 그 세를 가지고 대학 학비 내고 용돈까지 썼죠. 아마 그때 부동산 투자의 이점을 알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웃음)"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다 이후 LA와 세리토스, 오렌지카운티 소재 건물들을 사고팔면서 그는 부동산 투자로 승승장구했다. 90년대 초반엔 300만달러를 투자해 LA한인타운 버몬트 길에 있는 2에이커 규모의 반스마켓 건물과 대지를 매입하는가 하면 동부에 있는 부동산까지 사들였다. 그러면서 베벌리힐스에 250만달러 저택으로 이사도 했다. 미국 이민 20년 만에 일군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그러나 1994년 4·29 LA폭동이 터지면서 부동산 경기가 악화됐고 그의 사업체도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경기악화로 세입자들이 렌트비를 안내니 더 이상 페이먼트를 못하게 됐고 6개월 만에 은행 차압이 들어왔죠. 결국 모든 부동산은 은행으로 넘어갔고 그 후유증은 꽤나 컸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 경험은 그의 인생에 소중한 자산이 됐다. "투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관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걸 절감했죠. 이렇게 실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겸손해져요. 그러면 또 다른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실패했다 낙담 말고 이를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사업뿐 아니라 그는 LA한인사회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LA올림픽 라이온스 클럽 회장(1984)을 거쳐 LA상의 이사장(1987)과 회장(1988), 남가주상공인총연 회장(1988), 재미한인치과협 회장(1989)을 맡았고 1992년엔 한미문화교류재단을 창립해 '6·25참전 미군용사 위안의 밤'을 개최하며 한미 우호를 다지는데 노력했다. 사업이 힘들어져도 그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사업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1994년 가을 그는 박찬호 선수의 LA다저스 입단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것은 물론 이후 박찬호 후원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당시 4·29 LA폭동으로 한인사회가 크게 침체됐던 시기였어요. 그때 LA구단주와 식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박찬호 선수에게 관심을 보이길래 영입을 제안했죠. 힘든 한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일이라 확신했으니까요." 이후 반년 간 한국을 세 번씩 오가며 영입을 추진해 결국 그해 연말 박 선수의 입단을 성사시켰다. 뿐만 아니다. 한국중소기업 LA추진위원회 위원장(1996), 평통 회장(1997), 미주예총 고문(1997) 등도 그가 사업적으로 가장 힘든 고비를 넘길 때 맡은 직함이다.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내 코가 석자인데 단체 활동할 정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도 집도 있고 병원도 있잖아요.(웃음) 당시 건강만 잃지 않게 해 달라 기도했는데 그래서 의기소침하기보다는 더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려 노력했던 것 같아요. 워낙 제가 사람들 만나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웃음)" #행복한 인생 후반전을 위해 현재 그는 시니어센터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2008년 대한노인회미주총연합회 회장에 취임한 이래 시니어들의 복지에 관심을 가져온 그는 2013년 시니어센터 개관 당시 이사장으로 취임했지만 아내의 입원과 그 역시도 심장협착증 수술로 넉 달 만에 사임해야 했다. 그러다 지난해 다시 이사장직을 맡아 센터 활성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의 이런 열정은 그의 아픈 개인사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8년간 치매를 앓던 소아과 전문의였던 아내가 2015년 세상을 떠난 것. 이후 그는 1년간은 집과 치과만을 오가며 두문불출했다. "당시엔 왜 먹는지 왜 사는지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우울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인생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더군요. 사별 후 못해 준 것에만 연연해하기보다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을 때 열심히 돕는 게 의미 있는 인생이란 걸요. 그래서 작년에 갑작스러운 이사장직 제안을 수락했죠." 그는 내년엔 은퇴해 그동안 못했던 일들을 해보고 싶다 했다. 20년 전 입문했다 중단한 사진촬영부터 세계 여행까지 그동안 바쁘게 사느라 뒷전으로 밀어뒀던 진짜 해보고 싶었던 일에 도전할 계획이란다.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는 말했다. 나이 드는 게 비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사실은 젊기 때문이라고. 맞다. 청춘이 뭐 별거던가. 하고 싶은 일로 인해 여전히 가슴 뛰며 내일을 기대하는 한 그는 여전히 청춘의 한때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3-25

[인물 오디세이] 강령탈춤 해외전승자 강대승…우리가락 대중화 좇은 50년 예인 인생

고교 때 탈춤에 매료 10년 전수, 이수자 돼 시·국립 수석무용수 거쳐 사물놀이 '두레패' 창단 2000년 LA 이민 와 14년 해외전승자 선정 전승관 열고 후학 양성 작년 미주예총 회장 취임 혹시 기억 하는지. 90년대 후반 LA한인타운 웨스턴가 한인회 건물의 대형 벽화 속 농악패 복장을 하고 상모 돌리며 장구치고 있던 청년을. 그 사내가 바로 황해도 강령탈춤 해외전승자인 강대승(66)씨다. 당시 벽화 속 갓 서른을 넘긴 청년은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흰머리 희끗희끗한 초로의 신사가 됐지만 그 춤사위와 소리는 더 농익어 깊어졌다. 연기 전공자에 한국무용과 탈춤까지 섭렵하고 사물놀이에 미쳐 오늘에 이른 그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타고난 예인(藝人)이다. 그는 이를 운명이라 했다. 그 운명을 따라 산 넘고 물 건너 오늘에 이른 그를 만나봤다. #한국무용에서 사물놀이로 연극 연출가 부친과 한국무용가 어머니의 예술적 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는 어려서부터 예술방면에 두각을 나타냈다. 중학교 때 밴드부에서 활동하며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연주했고 안양예고 연극과에 진학해선 배우를 꿈꿨다. 고교 졸업 후 극단 '산하'에서 활동하다 1973년 국립가무단(현 서울시뮤지컬단) 1기 무용수로 발탁돼 입단했다. 가무단 활동을 하면서 명지전문대 무용과에 입학해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군복무를 마친 후 1978년 시립무용단에 수석 무용수로 입단했는데 당시 20명 단원 중 유일한 남성 무용수였던 그는 이후 주연을 도맡아 한국 무용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처럼 전도유망한 무용수였던 그가 1985년 돌연 안정적인 직장인 무용단을 사직하고 사물놀이 공연단 '두레패'를 창단했다. 밖에서 보기엔 갑작스러운 결정처럼 보였지만 그가 국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히 신문에 난 '제 1회 봉산탈춤 강습회' 공고를 보고 연기공부에 도움이 될까 싶어 갔다 무형문화재 34호인 강령탈춤 보유자 고(故) 양소운 선생과 운명적으로 조우한 것이다. 그의 실력과 열정을 높이 산 양소운 선생의 권유로 문하생이 된 그는 10년간 스승에게 탈춤을 전수받아 1980년 강령탈춤 이수자가 됐다. 이후에도 꾸준히 우리가락과 춤을 연구하다 1985년 우리 소리에 미친 다섯 남자와 의기투합해 '두레패'를 창단한 것이다. 두레패 대표직을 맡은 그는 경기도 송추에 연구소를 마련하고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마침 당시가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소리와 춤에 관심이 고조되던 터라 두레패는 국내는 물론 한국관광공사 홍보사절단으로 미국, 유럽, 일본, 중국, 호주 등 전 세계를 무대로 순회공연을 하며 우리 소리를 널리 알리는데 일조했다. #LA는 제2의 고향 이처럼 잘나가던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바로 1997년 터진 IMF 사태다. "IMF 여파로 공연기획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1년간 잡혀있던 공연도 모두 취소됐죠. 한 달이면 6~7회 잡혀있던 국내공연은 물론 연 2회 이상 잡혀 있던 해외공연까지 줄줄이 취소됐으니까요. 그 상태론 두레패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건 불가능했죠." 그래서 그는 두레패를 해산하고 1999년 호주 이민을 계획하고 가족과 함께 호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낯선 땅에서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건 녹록지 않았다. 페인트 기술을 배워 일을 시작했지만 급여를 제때 못 받는가 하면 일부 한인들의 차가운 시선에 속앓이를 하기도 했단다. 그러다 그해 가을 빙부상을 계기로 아예 이삿짐을 꾸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심기일전 2000년 2월 LA에 왔다. "LA에 올 땐 정말 비장한 각오로 왔죠.(웃음) 호주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엔 국악인이라는 이름을 벗고 진짜 이민자로 살아 보자고 단단히 각오했으니까요." 그러나 팔자 도둑질은 못한다고 오랜 가톨릭 신자인 그가 출석한 한인성당에서 지휘자가 단박에 그를 알아보면서 미사 때 장구 연주를 요청해 와 매주 국악미사를 이끌게 됐다. 그 소식이 LA와 타지역 성당들에까지 알려지자 그에게 탈춤 및 사물놀이를 가르쳐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이후 그는 낮에는 페인트 작업을 하고 저녁엔 LA, 풀러턴, 토런스, 롤랜드하이츠, 발렌시아 등에서 사물놀이 소모임을 이끌었다. 또 성당 지인의 도움으로 스왑밋을 돌며 건어물 장사도 시작했다. "정 많고 친절한 한인들 덕분에 잘 정착할 수 있었죠. 우리 전통문화를 사랑하고 관심 있는 이들도 많아 사물놀이를 꾸준히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했고요." #강령탈춤 해외전승자 되다 그는 2005년 필랜으로 이사했다. "한국에서도 그랬고 LA 와서도 늘 시골생활을 꿈꿨어요. 필랜은 눈보라가 칠만큼 사계절이 뚜렷하고 공기가 좋아 두 번 생각 않고 이사를 결심했죠." 2.5에이커 대지가 딸린 주택을 구입한 그는 그곳에 연습실을 마련하고 농사도 시작했다. "홍매실과 도라지 농사를 주로 했는데 홍매실은 키우기가 까다로운 작물이지만 약용작물로 인기가 높죠. 일부는 한약재로, 일부는 매실액을 담가 판매했는데 워낙 인기가 좋아 없어 못 팔정도였죠.(웃음)" 그렇게 농사일과 국악 교습으로 바쁘게 지내던 그는 2014년 강령탈춤 해외전승자로 발탁됐다. 당시 무형문화재 해외전승자는 북미 5명을 포함, 전 세계에서 10명만이 선정됐다. 그리고 이듬해 LA한인타운 8가 길에 강령탈춤 전승관을 열었다. 전승관은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고 있는데 현재 60여명이 모여 사물놀이, 탈춤 등을 배우고 있다. 무형문화재 49호 송파산대놀이 이수자인 아내 이현숙(64)씨도 그와 함께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후 활발한 활동을 펼친 그는 2016년 LA다운타운 노숙자를 위해 봉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오바마 대통령 봉사상을 수상했고 지난해 9월부터는 미주예총 회장직을 맡아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우리 소리와 춤을 한인들에게 전수하고 싶어요.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세계적인 탈춤축제와 타악축제를 LA에서 개최하고 싶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보다 더 오랜 꿈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노부부들에게 한국전통 혼례를 무료로 올려주는 겁니다." 아마도 그가 건네고 싶은 건 우리가락과 춤사위에 덧입힌 그의 따스한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제 땅 떠나 사는 게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잘 알기에 아프고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가락으로, 춤으로나마 그렇게 토닥여주고 싶었나보다. 태초부터 예술이 걸어온 길은 위로의 역사였으니.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3-18

[인물 오디세이] 뮤지컬 배우 임규진…뚝심의 악바리, 기적을 만들다

'판타스틱' 주연 발탁 주목 '뮬란' '미스 사이공'서 열연 영어발음 한계 극복하고 '왕과 나'로 브로드웨이 데뷔 현재 텁팀역 맡아 전국 투어 11일까지 코스타메사서 공연 참 매력적이다. 그녀. 조막만한 얼굴 큰 눈망울의 이국적인 마스크도 그러했지만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그녀만의 털털하고 진솔한 출구 없는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동안에 브로드웨이를 사로잡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2016년 가을부터 전국투어 중인 브로드웨이 뮤지컬 '왕과 나'에서 버마공주 텁팀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는 배우 임규진(29)씨다. 최근 브로드웨이에 한인 2세들의 돌풍이 거세다곤 하지만 한인 1세가 주조연급 배역을 맡아 무대에 서는 것은 흔치 않은 일. 휴가차 LA를 방문한 이 어메이징한 여배우와의 대화 혹은 수다는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유쾌하고 즐거웠다. 한 편의 뮤지컬처럼. #발레리나에서 뮤지컬 배우로 서울출생인 그녀는 세 살 때부터 발레를 시작했다 중2 때 아킬레스건을 다쳐 발레리나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그러다 대학입시를 두 달여 앞두고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했단다. "당시 뮤지컬 한 편을 봤는데 그 느낌이 너무 강렬했어요. 워낙 어려서부터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 받는 걸 좋아해서인지 뮤지컬 배우의 매력에 푹 빠졌죠." 그래서 2008년 1월 언니가 유학 중인 롱아일랜드 소재 파이브타운칼리지(FTC) 뮤지컬학과에 입학했다. "입학해선 엄청 고생했죠. 수업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영어가 완벽해도 힘든 연기 수업은 정말 악몽이었죠. 덕분에 매일 울며 지냈어요." 이후 언니와도 영어만 하고 계절학기까지 들으며 독하게 영어공부에 매달린 그녀는 2009년 실질적인 뮤지컬 공부를 위해 명문 뮤지컬학교인 AMDA(American Musical and Dramatic Academy)에 편입한다. #꿈은 이뤄진다 편입 후 그녀의 악바리 기질은 더 심해졌다. "춤은 어려서부터 췄지만 노래는 영 소질도 자신도 없었거든요. 그래도 어려서부터 연습벌레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노력하는 건 자신 있어서 헛구역질이 나올 때까지 노래 연습에 매달렸죠." 노래 연습만큼이나 그녀가 독하게 파고든 것은 영어 발음 교정. "뮤지컬 배우가 되려면 정확한 발음과 대사전달은 기본이에요. 그래서 저처럼 스무 살에 미국에 와 영어발음이 서툰 배우가 주조연급을 맡는다는 건 브로드웨이에선 거의 불가능하죠. 그래서 전문가를 찾아 교정 레슨을 받고 혼자서도 열심히 연습했죠." 순간 의아했다. '이 바닥' 현실을 이토록 잘 아는 그녀가 무슨 배짱으로 주조연급을 목표로 큰돈 들여 노래며 영어레슨을 받고 잠 못 자 가며 노래와 발음연습에 매달린 걸까. "저도 모르겠어요.(웃음) 제가 미국 가서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했을 때 격려해주신 부모님 말고는 다들 미쳤다고 했죠. 그래서 오기가 생긴 것도 있고…(웃음) 그런데 그보다는 당시 노래가 너무 좋았고 이왕 시작한 거 영어 공부를 제대로 해보자 싶어 하루하루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에요. 그러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네요." 그렇게 독하게 '열공'한 끝 그녀는 동기들보다 한 학기 빠른 2011년 2월 졸업했고 그 해 뮤지컬 배우 지망생들에겐 최고의 무대인 뉴욕 타운홀에서 개최되는 뮤지컬 콘서트 '브로드웨이 라이징 스타'에 선발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에도 그녀의 눈부신 활약은 계속된다. 2011년 그녀는 미주리에서 공연된 뮤지컬 '판타스틱스' 오디션에 응시해 당당히 여주인공 루이자역을 따냈다. "루이자는 그동안 백인배우들이 해왔던 역할이고 무엇보다 영어가 완벽해야 할 수 있는 배역이어서 붙을 거라곤 정말 기대 안했어요. 그저 AMDA 재학 시절 제일 해보고 싶었던 역할이어서 떨어질 각오를 하고 본 오디션이었죠. 덕분에 그동안 시달렸던 영어 콤플렉스에선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죠." 이후 그녀는 디즈니크루즈 무대에서 뮬란, 자스민 공주, 포카 혼타스 역을 맡아 선상에서 10개월여를 보냈다, 또 '미스 사이공'에선 앙상블, '디스인챈티드!(Disenchanted!)'에선 뮬란 역을 맡아 플로리다와 뉴저지 등에서 공연하며 뮤지컬 배우로서 입지를 다져갔다. #브로드웨이에 데뷔하다 그리고 2014년 여름, 그녀는 운명적인 작품과 조우한다. 브로드웨이에서 20년 만에 다시 공연된다는 것만으로 화제를 몰고 온 대작 '왕과 나'다. 그 유명세에 걸맞게 오디션엔 수천 명의 지원자들이 몰려들었고 석 달간 총 8번의 오디션 끝 그녀는 앙상블 겸 텁팀 언더스터디(유사시 배역을 연기할 수 있게 준비된 배우)에 발탁됐다. 텁팀은 시암 국왕에게 조공으로 바쳐진 버마 공주로 국왕과 여주인공 안나 다음으로 비중 있는 역할. 연습기간을 거쳐 2015년 5월 그녀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링컨센터 무대에 올라 브로드웨이에 입성한다. 그리고 그해 9월 텁팀 역으로 무대에 오른 이래 공연 기간 동안 수 십 차례 텁팀 역을 연기하며 주목받았다. 1년 6개월 뒤 공연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고 뒤이어 브로드웨이 제작팀이 론칭한 전국 투어팀에서도 그녀는 앙상블과 텁팀 언더스터디로 선발됐다. 그리고 투어 1년만인 지난해 10월 텁팀 역을 맡은 배우의 건강이상으로 그녀가 그 역을 맡게 됐고 지금까지 텁팀으로 열연 중이다. 현재 투어팀은 지난달 27일부터 코스타메사 시걸스트롬 극장에서 공연 중인데 이번 공연은 11일까지 계속된다. 이처럼 1년이 넘는 장기투어 덕분에 2014년 결혼한 뮤지컬 배우이며 성우인 남편과는 떨어져 지내고 있다. 그러나 오는 8월이면 캐나다 공연을 끝으로 그녀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신혼의 단꿈을 꿀 수 있지 싶다. 게다가 브로드웨이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은 만큼 앞으론 탄탄대로만 펼쳐지지 않겠는가. "어휴 아니에요. 다음 작품을 하려면 또 오디션을 봐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해요. 그때까진 낮엔 연습하고 오디션 보러 다니고 밤엔 또 아르바이트를 하지 싶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불투명한 미래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지금 이 무대를 즐기려고요. 수년전 제가, 그리고 지금 누군가가 그토록 서고 싶어 하는 소중한 무대니까요." 이제 막 입신(立身)에 접어든 이 전도유망한 여배우에게 어떤 응원의 말을 건네야 할까. 그저 미래를 불안해하느라 현재의 행복을 놓치진 말길. 1년 뒤 혹은 10년 뒤 어느 하루가 오늘 하루보다 더 가치 있다 말할 수 없으니. 행복은 언젠가 이뤄야 할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이니까.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3-04

[인물 오디세이] 자생한방병원 미주분원 이우경 대표원장…만능 스포츠맨을 꿈꾸는 한의사

서울 국제진료센터 거쳐 6년 전 LA 분원장 부임 서핑, 마라톤, 격투기에 극단 연극배우로도 활동 영어권 석·박사 과정 강의 통해 후학 양성 한국서부터 의료봉사 5년째 캄튼서 무료 진료 이토록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라니. 딱딱한 한의사인가 했는데 한때 연극에 빠져 연극배우를 꿈꿨고 여전히 그 꿈 아쉬워 무대에 오르는 아마추어 배우라고. 그렇다면 꽤나 감수성 풍부한 예술가이겠거니 했는데 웬걸, 서핑에 이종격투기까지 못하는 운동이 없는 만능 스포츠맨이란다. 바로 자생한방병원 미주분원(jasengusa.com) 이우경(41) 대표원장이다. 그러나 거듭되는 이 반전과 균열이 그리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건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가 삼라만상 곳곳에 관심 많은 르네상스맨임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이민 6년차 직장인이기도 한 그와의 대화는 이민 초년병들이 겪는 고민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넘나드는 '알아두면 쓸모 있는 신비한 잡학사전'처럼 신나고 유쾌했다. #연극배우 꿈 접고 한의사로 서울 출생인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고교시절 연극배우를 꿈꿨지만 고교 교사인 부친의 권유에 따라 1995년 세명대 한의대에 진학했다. 대학 진학 후 연극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했고 학교 행사 때마다 사회자로 불려 다니는 등 그동안 꽁꽁 감춰뒀던 끼를 발산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대학입시를 봐 연극과에 진학하겠다며 휴학계를 내고 대학로 극단에 입단하기도 하는 등 나름 파란만장한 청춘의 한때를 보냈다. 이후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 한 그는 그의 표현대로 죽어라 공부만 해 2005년 한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졸업했다. 졸업 후 그는 '사부'를 찾아 말 그대로 괴나리봇짐 달랑 둘러메고 전국을 다니기 시작했다.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이야기 같다 했더니 그가 웃는다. "당시로선 새로운 한의학 기술인 봉침, 추나, 약침, 비만치료·관리 등을 배우고 싶어 이 분야의 대가들을 찾아 다녔죠.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론 한계가 있어 현장에서 제대로 배우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서울은 물론 부산, 마산, 평택 등지를 돌며 수련을 마친 그는 2005년 인천에 한의원을 개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은 입소문을 타고 하루 평균 30~40명의 환자가 다녀갈 만큼 북적이며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2006년엔 경희대 동서의학대학원에 진학해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미국에 한국 한의학을 알리다 그렇게 잘 나가던 그가 2009년 돌연 한의원 문을 닫고 자생한방병원에 입사한다. "한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하면서 해외에 한국 한의학을 제대로 알리고 싶었어요. 한국엔 한의원이 포화상태라 블루오션을 개척해 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서 당시 미국을 오가며 가주 한의사 면허도 취득해 놨죠. 그런데 마침 막 미주 분원을 개원한 자생한방병원에서 한의사를 뽑길래 지원해 국제진료센터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이후 2012년 자생한방병원 LA분원 원장으로 발령이 나 미국에 온 그는 샌호세 분원을 거쳐 2013년부터 미주분원 대표원장을 맡고 있다. 그의 부임 후 병원을 찾는 타인종 환자들은 꾸준히 늘어 현재 전체 환자의 30%에 이를 만큼 그의 오랜 포부도 차곡차곡 실현되고 있다. 또 그의 환자들 중엔 유명 스포츠 스타들도 있어 눈길을 끈다. 바로 LA다저스 류현진과 텍사스 레인저스 추신수, PGA 프로골퍼 최경주 등이다. 특히 추신수 선수와는 텍사스 자택에 왕진도 가고 LA 원정경기가 있으면 어김없이 만나 식사를 할 만큼 막역한 사이가 됐다고. 이처럼 환자 진료 외에도 그가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건 후학 양성. 그동안 그는 동국대학교 LA캠퍼스와 라스베이거스 원구한의대에 재학 중인 영어권 석·박사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임상특강을 진행하며 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가르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소질도 있는 것 같아요.(웃음) 그래서 앞으론 보다 더 활발히 미국 한의대 강단에 서 한국 한의학이 지금껏 이뤄낸 과학적 성과들을 가르치고 싶어요. 그러다보면 제가 가르친 학생들을 통해 한국 한의학이 미국에 더 빨리 전파되리라 믿습니다." #만능 스포츠맨의 나눔 실천 아무리 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클 법도 싶었다. "처음엔 돌아갈 계획이었죠. 수입과 사회적 지위만 놓고 보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나으니까요. 그런데 지난해 결혼해 가정을 꾸리기도 했고 시간이 갈수록 한국에서의 지나치게 경쟁적인 삶보다는 지금의 저녁이 있는 삶이 좋아 정착할 계획입니다." 돈과 명예를 이기는 '저녁이 있는 삶'이란 게 언뜻 이해가 안됐지만 그의 꽤나 방대한 취미생활을 듣다보면 무슨 말인지 금세 수긍이 간다. 일견 책상물림처럼 보이는 그는 반전 있게도 자타공인 만능 스포츠맨이다. 대학 시절 입문했다 한동안 작파했던 마라톤을 미국에 와 다시 시작한 이래 그는 LA, 헌팅턴비치, 롱비치, 샌프란시스코 등 크고 작은 마라톤 대회에 꾸준히 참가할 만큼 마라톤에 푹 빠져 있다. 뿐만 아니다. 주말이면 서핑에 스키, 스노보드, 이종격투기까지 다양한 스포츠를 즐긴다. 매일 아침 3~5마일씩 조깅을 하고 주말이면 여름엔 바닷가를, 겨울이면 어김없이 스키장을 찾는 것이다. "매일 진료실에 앉아 환자들을 보다 보면 지치게 마련인데 이처럼 운동을 하면 활동적이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겨 스트레스 해소와 정신건강에 좋죠, 그리고 결국엔 이 좋은 에너지가 환자에게 전달돼 진료에도 도움이 되고요." 그리고 젊은 시절 매료됐던 연극도 다시 시작해 재작년부터 '굿모닝겨자씨' 극단에 가입해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동분서주하면서도 그는 의료봉사에도 열심이다. 미국에 오기 전까지 인천 소재 지적장애인 재활원에 5년간 정기 의료봉사를 다녔고 LA에 온 뒤론 캄튼 소재 한 무료 클리닉에서 5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그저 지금껏 운 좋게 제가 받은 걸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의사라는 직업이 시간이 갈수록 타성에 젖고 교만해지기 쉬운데 봉사활동을 하다보면 왜 의사가 되고 싶었는지 초심을 돌아보게 돼 오히려 제가 얻는 게 더 많아요." 쑥스러운 듯 웃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한국사회 올해의 키워드라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저녁이 있는 일상에 행복을 느끼고 베푸는 삶이 결국은 받는 삶이라는 일견 소소해 보이지만 확실한 행복을 이미 그는 손에 넣은 것이다. 그러나 소소하다기엔 그 행복 멀리서도 알아볼 만큼 크고 반짝거렸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2-25

[인물 오디세이] 덴톤스 로펌 박재균 변호사,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

12세 때 이민 온 1.5세 직장생활하다 법대 진학 65개국, 변호사 8천명 대형 글로벌 로펌 근무 10년째 무료법률 봉사 청소년 멘토링도 앞장 전미아태변호사협 선정 '무료법률 변호사' 영예 진중함과 유쾌함을 오가는 이 남자, 나지막한 저음으로 조근 조근 이야기를 풀어낸다. 직업병인건지 선천적 기질인지 단 한마디도 허투루 내뱉는 법 없었지만 대화가 깊어질수록 그 솔직함에 놀라게 된다. 적당히 가리고 적당히 부풀린다고 한들 '슬기로운 사회생활'이라는 명목 하에 미덕으로 봐줄 법도 할 터인데 그는 극구 끈질기게 솔직했다. 세계 최대 글로벌 로펌 덴톤스(Dentons US LLP) 박재균(44) 변호사다. 그 솔직함 덕 세계 최대 로펌 변호사니 인권변호사니 하는 자극적인 겉모습 뒤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사는 법을 고민하며 고군분투하는 평범한 한 남자의 민낯을 엿볼 수 있었다. 뚝심 있게 묵묵히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 박 변호사를 덴톤 LA지사에서 만나봤다. #역사학도에서 변호사로 서울 출생인 그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재직 중인 부친 덕분에 어려서부터 부친의 발령지인 호주와 인도에서 8년여를 거주하는 등 한국과 외국을 오가며 살았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86년 샌호세로 가족이민 왔다. 미국에 와 부친은 부동산 에이전트와 비즈니스 컨설팅을, 어머니는 피아노 교습을 시작했다. 중학교 졸업 무렵 가족은 LA 밸리로 이사했고 그는 채츠워스 고교 졸업 후 1992년 UCLA 사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다 교수가 되겠다 결심한 그는 대학원 학비를 모을 요량으로 UCLA 법대 행정관리팀에 취직했다. 2년 예정으로 시작한 직장생활이었지만 그곳에서 4년여를 근무했다. "대학입학 무렵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대학원 진학도 미루고 있었는데 한 교수가 법대가 적성에 맞아 보인다며 진학을 권유했죠. 사실 어려서 장래희망도 변호사였지만 막상 대학시절 로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해 보니 이상과 현실이 달라 포기했었는데 그 교수의 말이 자극이 됐죠. 그러나 법대에 가려면 당시 10만불 학비융자가 필요했는데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어요. 그래도 오랜 고심 끝 일단 저를 믿고 도전해 보기로 했죠." 그리고 그는 2001년 샌디에이고 대학(USD) 법대에 진학했다. #진짜 행복을 좇다 2004년 가주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그는 그해 샌디에이고 소재 중형 로펌에 취직했다. 1년 뒤 로스쿨 선배의 추천으로 샌디에이고 유명 로펌으로 이직한 그는 2006년엔 법대 동기인 캐시 박(40)씨와 결혼해 슬하에 남매를 두고 있다. 2013년 재직 중이던 로펌이 글로벌 로펌 덴톤스와 합병했는데 현재 덴톤스는 전 세계 65개국 지사에 총 8000명이 넘는 변호사를 거느린 세계 최대 로펌이다. 그의 전문 분야는 상법과 노동법. 그중에서도 건설공사 관련 케이스를 주로 담당했는데 지금껏 그는 미국 내 통신사, 대기업, 정부기관 등에서 의뢰받은 굵직굵직한 사건에서 승소를 이끌어내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현재 그는 시간 당 600달러에 육박하는 몸값 귀한 변호사가 됐지만 대나무 천장(bamboo ceiling)을 뚫고 이곳까지 오는 여정이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지 싶었다. "제가 근무 중인 샌디에이고 지사나 LA지사에 동양인 변호사는 몇 안 됩니다. 백인 변호사가 대다수죠. 그러나 보이지 않는 대나무 천장이 있다하더라도 열심히 하다보면 실력이 쌓이고 그러다보면 좋은 평판도 따라오게 됩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는 돈 잘 버는 변호사이기 보다는 좋은 남편이며 아빠이길 원했고 무엇보다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회구성원이고 싶어 했다. "변호사라는 직업이 워낙 스트레스가 심해 돈 벌 목적으로만 하면 매일이 불행하거나 오래 버티지도 못하죠. 제 주변에서도 행복하게 일하는 변호사들을 보면 누군가를 돕는데 소명의식이 있는 분들이거든요. 저 역시 변호사라는 직업을 지금껏 계속 할 수 있는 건 제 의뢰인을 돕는 보람과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무료 법률서비스인 프로보노(pro bono) 활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하여 변호사가 된 후부터 꾸준히 프로보노 활동을 펼쳐오고 있는 그는 지난해 11월 전미아태변호사협회(NAPABA)가 선정한 '올해의 무료법률봉사 변호사'로 선정됐다. 또 2016년엔 인권피해자를 돕는 비영리재단인 카사코넬리아 법률센터로부터 '올해의 무료법률봉사 변호사상'을 수상할 만큼 법조계에선 이미 인권 변호사로 유명하다. "변호사자격증으로 사회적 약자를 도울 수 있는 게 뭘까 찾다 시작한 일입니다. 처음 맡은 케이스가 에티오피아 난민 신청이었는데 법원에서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지자 의뢰인이 '당신이 내 생명을 구했다'고 울며 감사를 건넨 그 순간의 기쁨과 보람이 저를 지금까지 오게 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남미, 중동, 아프리카 난민들을 돕기 위해 케이스당 적게는 1년 많게는 2~3년의 시간을 들여 그들을 도왔다. 이뿐만 아니다. 그는 지역사회 봉사에도 팔 걷고 나서 2007년 샌디에이고 한인변호사협회 창립에 앞장섰고 2009년엔 샌디에이고 팬아시안변호사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저소득층 청소년 및 소수민족 청년들의 멘토링에 관심이 크다. 그래서 5년 전 로펌 내 동료 변호사 9명과 팀을 꾸려 비영리재단과 함께 저소득층 고교생들의 법률공부 및 법조계 커리어 계발을 적극 지원해오고 있다. 또 2014년엔 본보 샌디에이고 지사와 함께 한인청소년들을 위한 멘토링 및 자기계발 프로그램 'TYP'를 발족시킨 이래 지금까지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무엇일까. 그를 돈도 안 되고 그리 빛나지도 않는 자리로 이끈 건. "말도 통하지 않고 시스템도 다른 나라에서 고생하는 이민자들을 보면서 어려서부터 그들을 돕고 싶었어요. 특히 진로문제에 있어 적절한 조언을 해줄 이들이 없는 소수민족과 저소득층 청소년들에게 인생선배로서 멘토가 돼주는데 큰 보람을 느낍니다. 제가 그들과 나눌 수 있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는 게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죠." 루쉰은 말했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된다'고. 각자도생이 미덕이 돼버린 21세기,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는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더 특별해 보이는 이유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1-28

[인물 오디세이] 역사학자·작가 이자경 "나와 같은 세상의 아웃사이더 위로하고파"

77년 LA로 가족 이민 극작가·미술평론가 활동 88년부터 멕시코 이민사 취재 96년 '해외한인 기록물' 대상 4·29·인종차별·위안부 문제 등 사회성 짙은 희곡 꾸준히 발표 "한 시대 힘들게 살다 간 이들 이야기 전하는 게 평생 소명" 그녀에게선 68혁명 냄새가 났다. 그해 5월, 흑백사진 속 파리의 거리를 살펴보면 금방이라도 그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으니까. 극작가이며 역사학자인 이자경(73)씨다. 고희를 넘긴 노(老) 작가에게서 탈권위와 저항의 상징이었던 60년대 파리의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을 떠올리다니. 68세대들은 '서른이 넘은 사람을 믿지 마라'했지만 고희를 넘긴 노(老) 작가의 눈빛은 청년처럼 서늘했고 여전히 68세대들이 그토록 외쳤던 '금지된 것을 금지하기'위한 창조적 파괴의 지난한 여정에 서 있었다. #시대를 앞서 간 허무주의자 함북 회령 출신인 그녀는 1966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 입학했다. 고교동창들은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인 스물 셋 되던 해 대학에 진학한 것이다. "중·고교 때부터 학교 가길 싫어했어요.(웃음) 제도권 교육에 대한 반감도 있었고 학교에서 배울게 없다는 생각도 했죠. 대학은 부모님이 원해서 갔지만 대학 이후에도 아카데미즘엔 별 매력을 느끼진 못했어요." 대신 그녀는 책속으로 파고들었다.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를 지나 카뮈, 사르트르, 볼테르 등 유럽 사상가와 철학가가 그녀의 스승이 돼줬다. 또 대학시절엔 연극에도 관심이 많아 '극단 가교'에서 연출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1968년 한국정부가 실시한 한국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양성 교육에 홍일점으로 참가하는 등 새로운 기술과 신문물에도 관심이 많았다. 대학 졸업 후 행정 전문잡지 '월간 중앙행정' 기자로 취직한 그녀는 워터게이트 등 세계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굵직굵직한 사건분석 기사로 실력을 인정받아 입사 1년도 안 돼 편집장으로 고속 승진했다. "당시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많지도 않았고 한국 사회전반에 만연한 성차별로 직장생활이 쉽지 않아 2년 뒤 사직서를 냈죠. 이후 미국행을 결심한 것도 답답한 한국사회를 떠나 자유롭게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972년 결혼한 그녀는 파트타임으로 출판·잡지 관련 일을 하다 1977년 남편, 어린 딸과 함께 LA로 와 재봉일과 건물청소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렇다고 글쓰기를 작파한 건 아니었다. 한국 여성지 통신원으로 기사를 보내고 소설 공모전에도 응모하는 등 이역만리 타국에서도 창작열은 여전했다. #한인사회 문화부흥기를 주도하다 당시 그녀의 아파트는 LA에 거주하거나 LA를 방문하는 한국 예술가라면 반드시 들러야하는 사랑방이 됐다. 특히 미술과 연극계 인사들과 왕래가 잦았던 그녀는 1981년 LA 연극인들과 의기투합, '극단 1981'을 창단하고 그해 연작 '곡(哭) 1·2·3'을 선보여 LA타임스 등 주류 언론의 극찬을 받았다. 이외에도 그녀는 '20세기 고객 여러분'(1979) '단혈'(1983) '산타마리아 애비뉴의 살인'(1992) '니느웨로 가라'(1999), 4.29LA폭동 10주년 기념극 '블랙 아메리카'(2002) 등 사회의식 짙은 다양한 희곡을 발표해 무대에 올렸다. 또 그녀는 미술평론가로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80년대 LA 한인사회는 문화 부흥기였어요. 특히 실력 있는 한인 미술가들이 많았는데 평론가가 없다보니 이들이 제게 평론을 부탁해왔죠. 그래서 그때부터 독학하며 평론을 쓰기 시작했죠." 이처럼 극작가로 미술평론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녀에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1988년 멕시코를 방문했던 친한 지인으로부터 그곳에 한인 3세, 4세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 것이다. "노예로 팔려간 이민자들의 후손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죠. 피가 당긴 거라 할까요. 당시엔 무조건 만나봐야겠다는 생각밖엔 없었어요. 그래서 일단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멕시코 행 비행기에 올랐죠." 한 달간의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1년 뒤 이 취재기를 '일요뉴스'에 연재했고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멕시코 한인 이민사와 운명적 만남 이후 10년간 그녀는 틈만 나면 멕시코를 찾아 멕시코 이민 후손들의 발자취를 추적했다. 한인 2세, 3세 가정을 찾아 그들을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주 멕시코 한국대사관 및 한인회 창고에서 옛 자료를 뒤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 10년 간의 기록은 1996년 문화일보와 SBS, 지식산업사가 공동 주관한 '광복50주년 기념 해외 한국인 기록문화상'에서 대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98년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지식산업사)가 세상에 나왔다. 그동안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잊혀졌던, 1905년 에네켄(용설란)농장에 노예처럼 팔려갔던 1000여명의 한인들과 이후 100년 간의 비극적인 멕시코 이민사에 대한 재조명에 한국 언론과 학계는 뜨거운 관심을 보냈다. 이후 멕시코 이민 100주년을 맞아 한국정부와 대기업의 후원으로 2006년 그녀는 '멕시코 한인 이민 100년사'를 출판했다. 그러면서 소설 및 시 창작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를 다룬 '할로윈 파티'(2000), 80년대 군사정권을 비판한 '육손이'(2001), 일본계 회사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다 자살한 고 이명섭씨 사건을 다룬 '어느 한국인을 위한 보고서'(2010), 성경을 모티브로 현대사회를 비판한 시 바벨론별곡(2012) 등 대한민국 현대사와 미주 한인사회의 아픔을 다룬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했다. 젊은 시절 허무주의와 실존주의 철학에 빠져 자살충동에 시달린 그녀는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 부른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평생을 자신과 같은 아웃사이더와 그들의 연대기를 기록하는 데 바쳤다. "한 시대를 힘들게 살다 간 이들에 대한 연민이랄까 동질감이 저를 이곳까지 끌고 왔죠. 그들과 눈 맞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일이 결국 제 평생의 소명이지 싶습니다." 젊은 시절 그녀가 탐독했던 '아웃사이더'의 저자 콜린 윌슨은 '아웃사이더는 인간이 붐비는 곳에서 태어났지만 어떤 알 수 없는 정열적인 동경이 그들을 사막 속으로 몰고 간다'고 말했다. 그래서인가. 그녀는 오늘도 황량한 사막 속을 터벅터벅 걷고 있다. 그 여정 어디쯤에선가는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게 될까. 아니면 이미 그녀 오아시스 어디쯤에 도달해 그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걸까.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1-21

[인물 오디세이] 방송인 박혜란…여우(女優), 라디오 스타가 되다

고2때 잡지 모델로 데뷔 삼성전자 1대 전속모델 드라마·쇼 MC로 인기절정 95년 1.5세와 결혼 LA행 뉴스앵커·방송 리포터 활약 11년째 라디오 진행자로 인기 "화려한 연예계 생활보다 지금의 행복에 더 만족" 속절없는 세월 속 얼굴엔 주름이 하나 둘 자리 잡고 앉았지만 마음은 그 세월을 덧입어 더 평화롭고 고요해진 듯 했다. 배우 박혜란(52)씨다. 라디오 진행자로 어느새 10년 넘게 잔뼈 굵은 그녀지만 그녀를 기억하는 80·90년대 팬들은 연기자로서의 그녀가 더 익숙한 게 사실. '20대 스타 여배우, 결혼과 함께 도미'라는 어찌 보면 꽤나 진부해 보이는 이 문장 이후 그녀의 삶은 전혀 진부하지 않았다. 그녀의 재능을 아끼는 러브콜로 여전히 LA한인사회 대표 방송인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살지만 그 수식어 너머 그녀의 삶은 더 현명해지고 달큰해졌다. 함께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유쾌한 에너지를 주는 여우(女優), 박혜란씨를 만나봤다. #미녀 고교생 스타의 탄생 서울출생인 그녀는 고교 1학년 때인 1982년 당대 유명 여배우들의 등용문이었던 잡지 '여학생' 표지모델로 데뷔했다. 이후 광고모델 제안이 쏟아져 들어왔고 1년 뒤 그녀는 당시 한국 모델계를 이끌던 '모델센터'가 주최한 모델선발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며 본격적으로 모델 일을 시작했다. 유명 디자이너의 런웨이는 물론 유명제과, 패션, 교복 모델로도 종횡무진 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스타덤에 오르게 것은 1984년 삼성전자 전속모델로 발탁되면서부터. "고 2때 시작해 3년 정도 했어요. 제가 1대였고 뒤를 이어 허윤정씨, 고 최진실씨가 했죠. 개런티요? 1000만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해요. 그런데 개런티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서울역 앞 대기업 옥상 빌보드에 제 얼굴이 걸렸던 거예요.(웃음)" 고교졸업 후인 1985년 서울예전 영화과에 진학, 연출을 전공한 그녀는 대학 졸업 후 본격적인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 1988년 MBC 특채 탤런트로 선발돼 드라마 '푸른 계절' 주연을 비롯해 '겨울새' '3일의 약속' 등 10여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그러나 드라마 주인공보다 더 그녀가 빛을 발한 곳은 MC. KBS '신인무대'를 통해 MC로 데뷔한 그녀는 당대 최고 스타 고 이주일과 함께 '쇼 스타 탄생'을, 황인용과 함께 '0시의 초대석' 등을 진행하며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1993년엔 영화감독 이장호와 함께 CBS 라디오에서 '이장호·박혜란의 정보시대'를 진행하며 라디오 진행자로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운명적 사랑 쫓아 LA로 1989년 그녀는 운명적인 사랑과 조우한다. 현재 할리우드에서 엔터테인먼트 업체를 운영 중인 동갑내기 남편 케네스 김(52)씨다. LA 출신의 1.5세인 김 대표는 당시 UCLA를 휴학하고 한국에 와 작곡가겸 음반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고민 많던 연예계 생활에 큰 의지가 돼줬던 '교포 청년'과 사랑에 빠진 그녀는 7년여 연애 끝 1995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직전 한 지역 민영방송사에서 전속 MC직을 제안하며 연봉 1억원과 주택제공까지 제시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LA에 왔다. 인기절정이던 20대 후반이었다. 거절하기엔 너무 아까운 기회처럼 보였다. "그땐 사랑이 먼저였어요.(웃음) 그때로 다시 돌아가면요? 그래도 같은 선택을 하지 싶어요.(웃음) 제가 어려서부터 친정엄마처럼 반듯한 가정을 꾸리는 게 꿈이었거든요. 꿈을 이룬 셈이죠." 1996년 LA로 온 그녀는 한인 외주제작사가 제작하는 MBC와 KBS 여행프로그램 리포터로 활약했고 1998년엔 미주한국방송(KTE) 8시뉴스 앵커로 5년간 뉴스를 이끌며 LA한인사회 간판 앵커로 자리 잡았다.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었어요. 첫아이 출산 후 시작했는데 제가 유부녀인줄 모르고 중매 서주겠다는 분들부터 데이트 신청하는 이들까지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았죠. (웃음)" 둘째 출산 2주전까지 뉴스를 진행했던 그녀는 출산과 함께 사직했고 2005년 연기학원 및 매니지먼트 업체인 'CG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해 신인 연기자 발굴 및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2010년 경기악화로 문을 닫아야만 했다. #라디오와 함께한 11년 현재 그녀는 2008년 중앙방송(JBC) '상쾌한 이 아침에'로 마이크를 잡은 이래 현재 우리방송 '박혜란의 정보플러스'에 이르기까지 햇수로 11년째 라디오를 진행해오며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정보플러스'는 요일별로 부동산, 건강, 커뮤니티, 교육 등 다양한 주제로 진행되는데 게스트 섭외부터 대본, 곡 선정까지 모두 그녀가 직접 한다. "얼마 전 여든이 넘은 청취자께서 삼계탕을 들고 찾아와 방송 잘 듣고 있다며 격려해 주시더라고요. 이런 청취자들의 응원 덕분에 힘든 줄 모르고 지금껏 진행해 올 수 있었죠." 또 최근엔 도요타 한인커뮤니티 라디오 모델로도 발탁돼 2년간의 캠리 시승기를 라디오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할 예정이다. 이처럼 라디오 진행자로, 한인사회 대표 광고모델로 잘 나가는 그녀지만 그렇다고 지난 시간 늘 평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10년 전 남편인 김 대표가 투자사기를 당해 적잖은 돈을 날리며 힘든 시기를 겪기도 했다. "힘들었죠. 그런데 어차피 아무 것도 남지 않으니 마음을 비우게 되더라고요. 처음엔 남편 탓도 했지만 그 남자 맘은 얼마나 더 힘들까 싶으니까 마음이 짠하더라고요. 그때가 성탄 무렵이었는데 그래서 카드를 썼죠. 자기도 많이 힘들었겠다. 그래도 예쁜 아들 둘 있으니까 우리 힘내자. 당신을 응원한다고." 이후 김 대표가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시작하면서 부부는 3년여 간을 떨어져 지내야 했지만 남편은 금세 재기에 성공했다. 이젠 안정적인 삶에, 자녀들도 다 키웠겠다 더 늦기 전 한국에서 방송활동 재기를 생각해볼 법도 싶었다. "그러려면 살부터 빼고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웃음) 그런데 한국 방송활동은 큰 욕심 없어요. 젊은 시절 이미 스타로 살아봤잖아요. 지금처럼 사랑하는 가족들과 일상의 평온한 행복을 누리는 걸로 만족해요." 아뿔싸. 행복이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란 것을 또 잊었던가. 이 비루한 기억력이라니. 시인 김용택은 말한다. '이 세상의 수많은 별들이 저렇게 반짝이며 살아가듯이 인생도 그러하다. 누구의 삶이 더 빛나고 누구의 삶이 더 희미한 것은 아니다. 삶은 다 반짝인다. 밤하늘의 별빛처럼 말이다. 별이 반짝이듯이 지상의 모든 사람들도 반짝인다' <김용택 '마음을 따르면 된다' 中에서>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1-15

[인물 오디세이] 탑 메디컬그룹 오형원 박사 "끊임없이 배우는 게 늙지 않는 비결"

59년 서울대 의대 졸업 월남전 참전, 무공훈장도 76년 메릴랜드서 개원 81년 LA 와 25년 개업의 무료진료, 인술 펼친 공 인정 미 의회 수여 '올해의 의사상' "저소득층 환자 위해 무료진료 봉사하고파" 그와는 구면이었다. 수 년 전 야간진료센터에서 환자와 의사로 한 번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환자입장에서 그날의 만남은 꽤나 강렬했다. 당시 그는 약 처방과 함께 생활습관 교정과 증상에 좋은 식품까지 친절히 설명해 줬다. 환자 진료에 적잖은 시간을 할애하는 그 낯선 노(老)의사와의 만남은 신선하다 못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바로 가정의학과 전문의 오형원(83) 박사다. 다시 그는 여전했다. 남들은 은퇴할 나이에 진료 현장을 종횡 무진하는 그는 한인 환자들, 특히 자신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시니어 환자들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달 중 개원을 앞두고 있는 탑 메디컬그룹 진료실에서 오 박사를 만나봤다. #한인사회와 함께 나이 들다 대구 출생인 그는 경북고 1회 졸업생으로 1953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1959년 의대졸업 후 외과전문의가 된 그는 군의관 시절이던 1965년 월남전에 참전해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월남전에서 돌아와 수도육군병원 외과 부장으로 복무했고 제대 후엔 한미병원 외과 과장으로 재직하다 1973년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미국에 왔다. 메릴랜드에 정착한 그는 지역 종합병원에서 인턴십과 레지던트를 거쳐 1976년 개인병원(가정의학과)을 개원해 5년여 간 진료했다. 그러다 1981년 처가식구들이 있는 LA로 이주해 라크라센타에 병원을 개원했다. 2년 뒤 LA한인타운 6가 길에 분원을 오픈했고 1987년 라크라센타 병원은 닫고 8가길 동서식품 인근으로 이전해 LA한인타운에서만 20년 넘게 진료했다. 이처럼 진료경험이 풍부하다 보니 요즘도 젊은 한인 의사들이 그에게 한인 환자, 특히 시니어 환자 진료 노하우를 자문해오기도 한다고. "한번은 한 2세 의사가 시니어 환자들에게 어디가 아파서 왔냐고 물어보면 많은 분들이 온 전신이 아파서 왔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럴 땐 너무 당황스럽다고 어떡해야 하느냐고.(웃음) 그럼 제일 아픈 데가 어디냐 부터 차근차근 물어보라고 해요. 그러다보면 원인을 발견할 수 있게 되거든요." LA로 병원을 옮긴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한인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재미서울대 의대 총동창회 회장을 비롯, 서울대 남가주 총동창회장, 남가주 한인의사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올해의 의사상'부터 '의료 봉사상'까지 그러나 당시 그가 무엇보다 심혈을 기울인 것은 80년대 중반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HMO 한인 가입자들을 위한 한인 의사들로 구성된 IPA(Independent Providers Association)를 조직하는 것. 그래서 그는 뜻 맞는 한인 의사들과 함께 1988년 '유나이티드 MPO'를 출범시켰다. 이후 유나이티드 MPO는 LA 및 오렌지카운티 한인 의사 100여명이 가입된 명실상부 남가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메디컬그룹으로 성장했지만 몇 년 뒤 여러 한인 IPA가 출범하면서 자연스레 해체됐다. 이처럼 진료하랴 IPA 관리하랴 바쁜 와중에도 그는 보험이 없는 한인들을 위해 각종 의료혜택을 주선하는 것은 물론 이들을 위한 무료진료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그는 2003년 미국 의회로부터 '올해의 의사 상'을 수상했다. 이후 은퇴준비를 시작한 그는 두 딸들이 살고 있는 샌디에이고로 이주를 계획하고 2005년 병원 문을 닫았다. 그리고 2년 여간 한인건강정보센터에서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근무하다 2007년 샌디에이고 소재 한 한인 병원의 제안으로 파트타임 진료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샌디에이고 노인회와 연이 닿아 건강 세미나 및 서예 클래스를 이끄는 등 7년 넘게 LA와 샌디에이고를 오가며 살았다. 이처럼 한인 노인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힘쓴 공을 인정받아 그는 2013년엔 오바마 대통령이 수여한 '의료 봉사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7년 뒤 샌디에이고 이주를 포기한다. "30여 년 넘게 LA에 살아 이곳에 생활터전이며 친구들이 다 있다 보니 샌디에이고에서 영구 정착이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다 접고 다시 LA로 왔죠." LA로 돌아온 그는 2015년 LA한인타운 야간진료센터에서 1년간 근무했다. #서예는 평생의 길동무 한평생 의사로 살아온 그이지만 그의 인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서예. 20년 전인 60대에 서예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목판에 붓글씨를 새기는 서각(書刻)까지 섭렵했다. 이처럼 늦은 나이에 붓을 잡게 된 것은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부친은 한국서화가협회 회장을 지낸 고 서관 오해용 선생. 그러다보니 아주 어려서부터 서당에 다니며 집에서 붓글씨 연습을 즐겨했다고. "나이 들어서는 공부하랴 진료하랴 바빠 서예에 대해 생각해 볼 틈이 없었는데 60대에 들어서니 아버지 생전에 서예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당시 아흔을 넘긴 부친께 말씀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셨죠." 한국에 거주하던 부친은 그에게 문방사우를 보내왔고 그는 서예가에게 지도를 받으며 퇴근 후 3~4시간씩 연습에 매달렸다. 이후 미주한인서예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지난 20년간 협회에서 실시하는 연례 회원전에 참가했고 2년 전 한국 서예공모전에 응모해 오체상(五體賞)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6년 전엔 먹으로 난초와 꽃, 나무를 그리는 문인화에 입문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제 건강 비결이라면 비결일 겁니다. 그리고 나이 들어서도 봉사가 됐든 직업이 됐듯 일을 놓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젊음의 비결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야 늙을 새가 없거든요.(웃음) 그리고 무엇보다 기회가 된다면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 의료봉사활동을 꼭 하고 싶습니다." 문득 히포크라테스 선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중략)/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히포크라테스 선서 중에서> 반세기도 훨씬 전 한국의 한 젊은 의학도에게 큰 울림을 줬을 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어느새 백발성성 해진 노 의학자에게 여전히, 아니 세월의 무게를 덧입어 더 반짝이고 있었다. 가늠할 수 없는 그 세월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순간이었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8-01-07

[인물 오디세이] 한유정 미술감독, 영화적 상상력을 현실로 소환하다

한국 대기업 다니다 유학 USC서 무대디자인 석사 선댄스 초청 독립영화로 '영화미술 마이더스' 찬사 방송·영화 종횡무진 할리우드 사로잡아 디자인업체 '본때' 설립 인테리어 분야도 진출 복잡다단한 작가적 상상력과 명쾌한 현실 그 사이 어디쯤 그녀가 서 있다. 바로 할리우드가 사랑한 미술감독 한유정(44)씨다. '베터 럭 투모로우' '허스' '댄싱 닌자'등 수십 편에 달하는 한 감독의 필모그래피만을 봤을 땐 꽤나 콧대 높고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닐까 지레 짐작했다. 그러나 웬걸,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그녀는 솔직담백함에 유머까지 장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를 더 빛나게 한 건 초심이라 명명하기엔 훨씬 더 재기발랄하고 반짝이는 청춘의 열정이었다. #무대 디자이너를 꿈꾼 소녀 서울 출생인 그녀는 예원중·서울예고를 거쳐 1992년 이화여대 장식미술과에 입학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만난 한 성악가가 제가 미술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대뜸 한국의 무대 디자인이 너무 열악하다며 그 분야를 공부해 보라 권유하더라고요. 운명처럼 그 말이 가슴에 꽂혀 그 후부터 줄곧 미국 유학을 꿈꿨죠." 대학 졸업 후 유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96년 대기업에 입사한 그녀는 새벽엔 영어학원에 다니고 퇴근 후엔 대학원 입학전형에 필요한 포트폴리오를 만들며 차근차근 유학준비를 했다. 이후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미련 없이 사표를 내고 1997년 유학길에 오른 그녀는 USC대학원에서 무대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오랜 꿈을 이룬 기쁨도 잠시, 그해 겨울 IMF사태가 터졌다. "전액장학금을 받아 학비는 해결됐지만 환율폭등으로 생활비가 문제였죠. 그래서 조교부터 시작해 소품실 관리인까지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또 집세가 저렴한 곳으로 이사하고 끼니는 고추장에 밥 비벼 김 싸 먹기도 하고 매주 두 차례씩 맥도널드에서 3개에 1불하는 햄버거를 사와 냉동시켰다 데워 먹으며 생활했다.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하루 2~3시간밖에 못자는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었죠. 그래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미쳐도 좋아 그녀가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USC대학원 영화과 학생들에게 단편영화 미술감독 의뢰를 받으면서부터. 이후 입소문을 타고 학생들의 의뢰가 쏟아져 들어왔다. 가뜩이나 모자란 생활비를 저예산 영화 세트 디자인에 쏟아 부으며 미친 듯 일하던 그녀에게 상업영화 데뷔 기회가 찾아왔다. 배우 정우성과 고소영이 주연을 맡고 LA에서 올로케 촬영한 한국영화 '러브'(1999) 제작진이 그녀에게 미술감독을 제안해 온 것이다. "미술감독은 세트뿐만 아니라 영화에 나오는 모든 배경과 소품을 관장합니다. 주인공이 사는 아파트부터 세탁소, 식당에 길거리 장면까지 영화적 상황과 캐릭터에 맞게 디자인하는 거죠. 그러다보니 어떤 배우들은 제 세트에 들어와서 아 이제야 내 캐릭터가 파악 되네요 라고 말하기도 해요. 제겐 최고의 찬사죠." 이후 그녀는 독립영화 '리틀 히어로즈'의 미술감독으로 참여하는 등 학업과 영화 미술감독을 병행하며 2000년 석사학위(MFA)를 받았다. 졸업 후 그녀가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 알린 건 영화 '베터 럭 투모로우'(Better Luck Tomorrow, 2001)를 통해서다. 선댄스 영화제 초청작이며 개봉 첫 주 최다관객 동원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 영화의 미술총감독을 맡은 그녀는 '1만불짜리 세트를 10만불짜리로 돋보이게 하는 마이더스의 손'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할리우드에 화려하게 입성한다. 그리고 2001년엔 2000만 달러가 투입된 영화 '맨 프롬 엘리시안 필즈'(The Man from Elysian Fields)에서 어시스턴트 아트디렉터를 맡아 앤디 가르시아, 믹 재거 등 할리우드 스타들과 작업했고 2003년엔 알리시아 실버스톤과 우디 해럴슨 주연의 '스코츠드(Scorched)'에서 아트디렉터을 맡았지만 촬영 중 복잡한 내부사정으로 인해 우여곡절 끝 중도하차했다. "그러면서 슬럼프가 찾아왔어요. 그때 마침 한국에서 영화 미술감독 제안이 들어와 한국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거기서 포기할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웃음) 미국에 남았죠." #할리우드가 사랑한 미술감독 심기일전한 그녀는 이후 영화는 물론 각종 TV 쇼 미술감독으로 이름을 날렸다. 2002년 파라마운트사가 제작한 TV리얼리티쇼 '제이미 케네디 실험'(JKX)을 비롯해 2007년 케이블채널 코미디센트럴에서 방영된 '하프웨이 홈'(Halfway Home), 영화 '익스포즈드'(Exposed,2003) '웨이스트 딥'(Waist Deep,2006), 라스트 나이트(Last Knight,2012) 등 수 십여 편의 방송과 영화에서 프로덕션 디자이너 및 아트디렉터로 종횡무진했다. 또 제8회 전주주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한미합작 영화 '허스'(HERs,2007)의 미술감독으로 참여하는 등 한국 영화계와도 교류도 꾸준히 이어갔다. 덕분에 그녀는 2006년 KBS '지구촌 한국인 젊은 그대'에 소개되며 한국 청년들의 워너비가 됐고 2010년엔 베스트셀러 '꿈보다 먼저 뛰고 도전 앞에 당당하라'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무렵 IT업계 종사자인 한인 2세와 결혼해 슬하에 세 살배기 딸을 둔 그녀는 출산 후 육아를 위해 제작 일선에서 잠시 떨어져 지내기도 했다. 대신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다른 일들에 도전했다. 2012년 LA한류체험관 디자인 및 인테리어를 진두지휘했고 2013년부터 올해까지 뉴욕필름아카데미(NYFA)에 출강하기도 했다. 또 한국 드라마 로비스트(2007), 상속자들(2013)의 미국촬영 분 미술감독을 맡기도 했다. 현재 그녀는 디자인회사 '본때'(productiondesigner.tv)를 운영하며 영화, 방송, 광고의 미술 디자인 및 상업 및 주택 인테리어 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아직 구체화 되진 않았지만 조만간 영화와 방송계에서 지금껏 시도하지 않은 실험적인 작업들을 해보려 열심히 구상 중입니다." 지금껏 달려온 것만으로 숨 가쁠 터인데 그녀는 여전히 새 길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 있던 꿈도 슬며시 접을 나이에, 그렇다한들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지금, 다시 길 떠날 채비라니. 의아해 하는 눈빛에 그녀는 지금껏 쌓은 경험이 가장 큰 자산인데 이 보다 더 좋은 타이밍은 없다며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짓는다. 순간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 위로 반짝이는 햇살 한줄기 내려앉는다. 길 떠나기 딱 좋은 날이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7-12-24

[인물 오디세이] 글로벌원 써니 채 대표…화려하거나 혹은 눈물겹거나

마이클 잭슨 내한공연 등 한미 오가며 사업 키워 올해 비영리재단 설립 노숙자 돕기 사역 열심 빛바랜 컬러 사진 속엔 동양인치고 유달리 팔다리가 긴, 모델 포스 짱짱한 아가씨가 서 있다. 40년 전 그녀다. 그리고 바로 오늘의 글로벌원(globaloneltd.com) 써니 채(59) 대표이기도 하다. 눈물 나게 반짝이는 청춘이 그곳에서 무심한 듯 시크하게 40년이란 세월을 건너 웃고 있었다. 어쩐지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묘한 비현실감 마저 느껴졌다. 흥미진진한 판타지와 냉정한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화보다 더 화려하게 그러나 그 굽이굽이 역경과 사연도 많았던 그녀의 아주 특별한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당찬 소녀, 모델이 되다 서울이 고향인 그녀는 1973년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로 이민 왔다. 당시 그녀 나이 열세 살. 혈혈단신 오른 미국행이었다. "제가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새어머니와 갈등이 심해지고 골목대장 노릇 하면서 말썽만 부리니까 당시 육군 장성이던 아버지가 잘 알고 지내던 유타에 사는 미군 장교 댁으로 절 보내셨죠. 저 역시 어릴 때부터 미국에 오고 싶기도 했고요." 어린 나이에 쉽지 않은 이민살이였겠다 싶었는데 웬걸, 이런 걱정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그녀는 참 씩씩하게 살았다. 오자마자 패스트푸드 체인 점원을 시작으로 8학년 때는 자전거를 타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화장품 방문판매원을 하며 용돈을 벌어 썼단다. 그러다 레스토랑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11학년 때 식당을 찾은 한 고객이 백화점 모델을 해 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해왔다. 요즘으로 치면 길거리 캐스팅인 셈이다. "당시 노스트롬 백화점 본사가 유타에 있었어요. 그래서 매 시즌 카탈로그 촬영을 하는데 동양인 모델이 필요하다며 저에게 캐스팅 제안을 해왔죠." 첫 촬영에서 그녀가 받은 보수는 600달러. 당시 그녀가 식당에서 한 달간 버는 돈의 두 배가 넘는 액수였다. 이후 유타대학교 영문과에 진학한 그녀는 본격적으로 각종 로컬 지면광고 및 TV 광고 모델을 하며 유타주 스타로 떠올랐다. #모델 에이전시로 대박 대학 4학년 때 그녀는 유명 모델 에이전시에서 캐스팅디렉터 어시스턴트로 인턴십을 하면서 에이전시 사업 전반에 대해 익히게 된다. 그러면서 모델 양성교육 사업에 전망을 발견하고 전국을 돌며 모델교육 세미나를 시작했다. 1년여 간의 세미나 사업은 성공적이었고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졸업하던 해인 1986년 본격적으로 모델 에이전시 사업에 뛰어들어 솔트레이크 시티에 '써니 채 인터내셔널' 간판을 내걸었다. 그녀의 명성을 듣고 모델들이 몰려들었고 에이전시는 금세 150여명의 소속 모델을 거느리게 됐다. 그러나 모델 매니지먼트보다 그녀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모델 수업. 처음엔 모델 지망생들이 수업을 들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입소문을 타고 상류층 자제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모델 교육이라는 게 걸음걸이부터 생활매너, 에티켓 같은 걸 가르쳐서 그런지 부잣집 사모님들이 앞 다퉈 딸들을 보내기 시작했죠. 나중엔 유타뿐 아니라 아이다호, 와이오밍, 덴버에서까지 학생들이 밀려와 감당이 안 돼 수업료를 1인당 3000달러까지 올렸는데도 줄질 않았으니까요. 덕분에 떼돈을 벌었죠.(웃음)" 큰돈을 번 그녀는 솔트레이크 시티 다운타운 소재 4000스퀘어피트 규모의 유서 깊은 랜드마크로 사무실을 이전했고 오프닝 당시 주지사가 와 축사를 해줄 만큼 그녀는 지역사회에서영향력 있는 사업가로 발돋움 했다. "호시절이어죠. 당시 촬영장에 엑스트라 1000명을 보내면 그날 오후 더플백에 10만달러 현금을 담아주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이후 그녀는 한국과도 활발하게 사업적 교류를 가졌다. 1989년 개장을 앞둔 실내 테마파크 롯데월드에 마술사 및 전문 공연단원을 파견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녀는 1996년 마이클 잭슨의 첫 내한공연 당시 한국과 미국 대행사간 다리 역할을 하면서 업계에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90년대 후반 한국에서 큰 화제를 모았던 브룩 쉴즈, 브래드 피트, 피어스 브로스넌 등 할리우드 스타들의 광고모델 계약도 그녀의 손끝을 거쳤다. #노숙자 사역, 꿈을 품다 사업은 승승장구해 그녀는 1998년 시애틀을 필두로 댈러스, 휴스턴, 조지아 등에 연달아 지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2001년 9·11테러 이후 광고시장이 급속도로 냉각되면서 그녀의 사업도 적잖은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전국 지사를 모두 닫고 본사를 LA로 이전하면서 회사명도 '글로벌 원'으로 교체했다. 몇 년 뒤 사업은 안정을 되찾았지만 2008년 그녀는 이혼의 아픔을 겪는다. 마흔 넘어 한 10여 년간의 결혼생활을 정리한 것이다.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죠. 그래도 그때 신앙을 가지면서 이겨 낼 수 있었습니다." 현재 한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는 지난 10년간 한국어를 제대로 배운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 말한다. "설교 이해는 물론 교인들과도 소통해야 하니까 한국어 공부가 절실했죠. 그래서 매일 아침 한국어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어요. 이젠 한국 아줌마 다 됐죠.(웃음)" 현재 LA다운타운에 본사를 둔 글로벌원은 10대부터 70대까지 모델 및 배우 500여명을 거느린 토털 매니지먼트 업체로 자리매김했으며 시애틀, 휴스턴, 조지아 지사도 다시 오픈했다. 그러나 요즘 사업보다 그녀가 더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은 바로 노숙자 사역. "지난해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노숙자들을 보면서 마음에 소망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이들을 집으로 데려다 씻기고 입혀 이야기도 나누고 자립할 수 있게 일자리를 찾아 주기 시작했죠." 그러나 개인적 도움만으로는 갈수록 늘어나는 LA 노숙자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올해 비영리재단 '리조이스 인 호프'(rejoiceinhope.org)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노숙자 돕기에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녀의 꿈은 노숙자들이 함께 모여 살며 자급자족할 수 있는 캠핑장을 짓는 것. 그래서 그녀는 주정부에 이에 관한 계획서를 제출했고 관련 부서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한다. "요즘 그 어느 때보다 살맛나요. 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니 매일 매일이 행복하고 감사할 따름이죠." 허튼 말이 아니었다. 일견 이 평범한 말이 특별하게 와 닿았던 건 그저 말뿐이 아닌 그녀의 현재 삶이 그 행복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심만큼 힘이 센 감동은 없는 법이니까.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7-12-17

[인물 오디세이] 캘스테이트 풀러턴 연극학과 김현숙 교수, 무대의상에 영혼을 불어넣다

대학시절 연극반서 활동 미국 유학…무대의상 전공 95년 뮤지컬 명성황후로 한국 넘어 해외까지 주목 05년 미국대학 교수 임용 지난해 CSUF로 자리 옮겨 미국서도 작품 활동 왕성 "영화 의상도 도전하고파" 그녀의 무대의상보다 더 마음을 빼앗긴 건 그녀의 디자인 스케치였다. 실크와 시폰, 레이스 소재에 잔잔한 플라워 프린트가 돋보이는 19세기말 로맨틱 드레스(연극 '사랑의 헛수고')부터 1920년대 파리 물랭루즈 무대를 연상시키는 과감한 블랙드레스에 초크 목걸이, 망사스타킹(뮤지컬 '와일드 파티')까지 그녀의 스케치엔 어쩐지 20세기 초 영미 문학작품 냄새가 짙게 배어있다. 1995년 초연된 '명성황후' 무대의상 디자이너로 세계를 사로잡은 캘스테트 풀러튼 연극학과 김현숙 교수다. 그녀의 무대의상만큼이나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그녀를 만나 봤다. #연극에 빠지다 고대 신문방송학과 72학번인 그녀는 대학 2학년부터 졸업 때까지 연극반에서 활동했다. "고교시절 미술가가 되고 싶었어요. 예술방면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 비슷한 동아리를 찾다 연극반에 들어갔죠. 그러면서 작품을 분석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인 연극의 매력에 빠지게 됐죠." 대학 졸업 후 국제복장학원에서 1년간 패션 공부를 마치고 1981년 일리노이주립대 시카고(UIC) 대학원에 진학, 무대의상 디자인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 신문·방송사 입사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오랜 꿈이었던 예술가가 되고 싶어 고민하다 연극과 패션을 둘 다 할 수 있는 무대의상을 공부해 보기로 했죠. 가족들과 주변에선 만류했지만 적어도 그 분야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2년 뒤 석사학위를 취득한 그녀는 다시 일리노이주립대 어바나샴페인(UIUC) 대학원에서 무대의상디자인에 있어선 최종 학위인 MFA(Master of Fine Arts) 과정을 시작한다. 당시 한인은 물론 동양인도 찾아보기 힘든 백인학생들 틈바구니에서 빡세기로 유명한 커리큘럼을 쫓아가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그러나 이런 그녀의 '엄살'과 달리 실상은 미대를 졸업한 동기생들보다도 월등한 드로잉 및 디자인 실력을 인정받아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닐 만큼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뮤지컬 명성황후의 탄생 MFA 학위취득 후 1986년 귀국한 그녀는 한양대, 중앙대, 서울여대, 한예종 등의 의상학과와 연극과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또 한국 1세대 유학파 무대의상 디자이너라는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며 1985년 국립극장에 오른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을 필두로 '한여름 밤의 꿈', '구렁이 신랑과 그의 신부' '우리들의 사랑' 등 내로라하는 유명 작품들의 무대의상 디자이너로 참여하면서 한국 공연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학 강단으로, 무대로, 어린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종횡무진하며 1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는 뮤지컬 '명성황후'와 운명적인 조우를 한다. 1995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초연된 이래 20년 넘는 세월동안 장장 1000회가 넘는 공연에 관객 수만도 160만이 넘게 든, 지금까지도 국민 뮤지컬이라 불리 우는 '명성왕후'의 무대의상이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한 것이다. 리서치부터 스케치, 제작까지 꼬박 1년이 걸렸고 무대에 오르는 의상만 총 600벌. 여기에 버선, 속적삼, 속치마 등 속옷까지 합치면 1000여점이 넘는 당시로선 보기 드문 대형 프로젝트였다. "공연의상은 박물관 의상은 아니에요. 시대 고증을 바탕으로 하지만 작품에 맞게 스타일이 재창조되죠. 그래서 명성황후 의상엔 색상이 선명하고 질감이 풍부한 벨벳이나 오간자, 자카드, 레이스 등과 같은 서양 직물들도 사용됐고 디자인도 선과 형태를 과장시켜 무대를 더 풍부하고 장엄하게 만들었죠." 이렇게 탄생한 명성황후의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무대의상은 이후 미국과 영국, 캐나다 공연 당시 관객들을 매혹시켰고 현지 언론들의 찬사도 쏟아졌다. 이처럼 대중과 평단의 호평이 이어지면서 그녀는 1996년 한국 뮤지컬 대상 시상식에서 '명성황후'로, 이듬해 백상예술상에선 '구렁이 신랑과 그의 신부'로, 1999년 동아연극상에서 '유랑의 노래'로 무대의상 상을 수상했다. 이후 그녀는 오페란 카르멘(한국오페라단·1998), '코리아 환타지'(국립극단·2000), '춤 춘향'(국립무용단·2001), 지하철 1호선(학전·2001) 등 한국 공연계에 한 획을 그은 다수의 작품들에 참여하면서 명실상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무대의상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했다. #미국대학 교수로 인생 2막 이처럼 잘 나가던 그녀가 2005년 돌연 미국행을 선택한다. 인디애나 볼스테이트 대학(BSU) 연극학과 부교수로 임용된 것이다. "그 무렵 큰 딸이 사법고시에 합격, 판사로 임용돼 엄마로서 한시름 놓으면서 세계를 무대로 무대의상 디자인도 하고 후학도 양성해 보자 싶어 미국 대학에 지원해 왔죠." 그리고 어느새 강산이 한번 바뀌고도 2년이란 시간이 더 흘렀다. 나이 쉰 넘어 시작한 인생 2막 길이 결코 녹록지 않았을 터지만 지난 시간 그녀는 강단에서 즐겁고 행복했다고 말한다. "학생들 가르치는 게 참 보람 있어요, 학생들이 잘 되면 본인보다 더 기쁘고 바로 그 즐거움에 힘든 것도 잊을 정도니까 가르치는 게 천직이지 싶어요.(웃음)" 또 그녀는 학생들의 무대의상 디자인을 감독한 것을 포함, 뉴욕 팬아시아 레퍼토리 시어터, 캐피털 레퍼토리 시어터 공연 등 지금껏 총 40여 편의 작품 속 무대의상을 맡아 현역 디자이너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 내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막되는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에서 '한 여름 밤의 꿈' 무대의상도 맡아 준비 중이다. 이처럼 숨 가쁘게 달려온 그녀가 지난해 캘스테이트 풀러튼 연극학과 교수로 임용돼 캘리포니아로 왔다. "너무 좋죠.(웃음) 둘째 딸이 이곳에 살기도 하고 무엇보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환경이어서 꼭 이곳 대학에 와 가르치고 싶었어요." 이처럼 쉼 없이 달려온 그녀이지만 새로운 무대에 대한 갈증은 여전했다. "영화를 너무 좋아해요.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한국이든 미국이든 영화 의상에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할리우드 한인들과도 작업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인터뷰 내내 큰 감정 표현이 없던 그녀가 순간 소녀처럼 들떠보였다. 그 미세한 설렘과 떨림이 맞은편 자리까지 와 닿는다. 그 희망사항 속 뜨거운 진심과 열정이 눈에 보이지 않는 행간을 가득 메웠다. 바로 그녀처럼.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7-12-10

[인물 오디세이] 크리스토퍼 리 감독…아버지의 역사를 찾아가다

6·25,위안부,탈북자 등 한국현대사 재조명 주목 동화책 집필로 수상도 현재 상업영화 준비 중 그의 스튜디오는 LA의 유서 깊은 스패니쉬풍 건물 2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담한 중정(中庭)이 내려다보이는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은은한 조명 밑에 자리하고 있는 게임 CD들과 영화 포스터, 작업용 컴퓨터, 거기에 영화 촬영장비까지 뒤섞여 만들어 내는 이국적인 분위기는 어쩐지 파리 시내 오래된 서점을 연상시켰다. 이 아름다운 스튜디오 주인장은 최근 한국전쟁부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까지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이야기를 다큐로 담아내 미국과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크리스토퍼 리 감독. 다음 작품 제작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건축가에서 게임 개발자로 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75년 LA로 가족이민 온 그는 글렌데일에서 초중고를 마쳤다. 학창시절 미술에 두각을 나타낸 그는 캘폴리 포모나에서 건축과 경영학을 전공했고 대학 졸업 후인 1987년 디즈니사에 입사해 디즈니 테마파크 및 리조트 설계업무를 담당했다. 이후 유명 건축사무소로 이직해 미국 내 유명 호텔 및 리조트 건축에 참여했다. 그러다 1992년 대전 엑스포 전시관 설계에 참여하게 된다. "대학시절까진 흔히 말하는 바나나였죠.(웃음) 겉은 동양인이지만 속은 하얀… 한국말도 잘 못하고 문화도 잘 몰랐으니까요. 그러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는 해 휴가를 내고 한국에 갔죠. 1주일 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는데 그러면서 제가 한국인임을 알게 됐고 이후 한국 문화도 공부하고 한인 친구들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대전 엑스포가 열린다기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게 됐죠." 당시 그는 전시관 설계 외에도 90년대 한국에서는 생소한 분야였던 5D 영상물 제작에 참여하면서 영상물 제작에 큰 관심을 갖게 된다. 그래서 LA로 돌아와 1993년 영상물 제작 프로덕션을 설립했고 이후 미국, 러시아, 한국 등에서 제작된 애니매이션 및 영화 포스트 프로덕션(후반 작업) 감독 겸 프로듀서로 참여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이 다재다능한 젊은 예술가의 호기심이 여기서 멈출 리 만무. 1996년 그는 어려서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비디오게임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후 그는 10년간 PC게임 및 PDA/모바일 앱 15편을 출시하며 업계에 주목을 받았다. 그러면서 한국 대학들이 앞다퉈 그에게 강의 요청을 해왔고 그는 지난 12년간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한예종 등에서 특강과 워크숍을 이어오고 있다. #다큐 감독이 되다 그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5년 전 그는 한국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페이딩 어웨이(Fading Away·fadingawaymovie.com)'제작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작고한 부친을 생각하며 아버지의 역사를 되짚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하게 됐죠. 저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와 아버지 세대를 이어주며 소통할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막막한 도전이었지만 그의 다큐 제작 이야기가 본지에 소개되면서 LA는 물론 타주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수백여 명의 한인들이 그에게 연락을 해왔다. 그러면서 한국전쟁 참전 종군기자였던 프랭크 윈슬로씨를 알게 됐고 그에게 각종 사진 자료들과 기사를 얻으면서 다큐 제작은 급물살을 탔다. 그리고 마침내 2013년 100여명의 한인 및 타인종 참전군인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가 탄생했다, 이후 한국전쟁 종전 60주년을 기념해 미 국방부 주선으로 그의 작품은 UCLA, USC, 하버드, MIT 등 미 대학 30여 곳에서 상영됐고 특강도 함께 진행됐다. 이후 그는 총 3편의 다큐를 더 제작했다. 탈북자로서는 처음으로 미 시민권자가 된 20대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아이 앰 그레이스(I am Grace·2014년)'를 비롯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다룬 '더 라스트 티어'(The Last Tear·2015년), 한국전쟁에 참가한 미국 내 일본인 3세 6000여명에 관한 이야기인 '레스큐드 바이 페이트(Rescued By Fate·2016년)'가 그것. 특히 존스홉킨스대학 한미연구소와 공동으로 제작한 '더 라스트 티어'는 지금까지 115개의 영화제에 참가, 60여개의 상을 수상했는데 2015년엔 칸 단편영화제에서도 입선하는 등 세계적으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 현재 그는 내년 상영을 목표로 중앙아시아에 거주 중인 고려인 150주년을 소재로 한 '힐스 오브 아리랑(Hills of Arirang)'과 1963년 한국 내 정식 입양기관을 통한 미국 입양 첫 사례인 5명의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플라이트 버디스(Flight Buddies)'를 제작 중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가 하는 질문을 들고 아버지 시대의 궤적을 쫓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웃음) 제 영화엔 정치적 관점은 없습니다. 다만 험난한 역사를 온 몸으로 살아온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고 관객들도 그 시대를 공감하며 함께 소통할 수 있길 바랐을 뿐이죠." 현재 그는 또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바로 할리우드 상업영화에 도전장을 내민 것. 그가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시나리오 '힐(Hill) 433'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2019년 상영을 목표로 현재 사전 작업 중이다. 이처럼 다큐 제작으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그는 2015년 한국 전래동화를 모티브로 한 동화책 '더 클레버 스왈로우(The Clever Swallow)'를 집필해 '인디펜던트 퍼블리셔 북 어워드'에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올해 한국 청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성공하고 싶니? 성공이 뭔지 알아?'를 출판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한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인턴십을 제공하고 워크숍도 해오면서 한국 청년들이 극심한 경쟁에 치여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죠. 그래서 이들에게 진정한 행복이란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 아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순간순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오늘이 마지막이 아닌 내일에 대한 설렘으로 잠이 안 오는 삶이라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 성공했다 자부하고 진심으로 행복하다 말한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이주현 객원기자joohyunyi30@gmail.com

2017-12-03

[인물 오디세이] 리오 김 PGA 헤드프로…꿈을 좇는 집념, 불가능은 없다

의류 도매업체 운영 사업가로 승승장구 골프입문 1년 만에 싱글 로컬대회 우승 휩쓸어 40대 초반 클래스A 도전 10년 만에 자격증 취득 피아니스트 전공 살려 성당서 반주자 봉사도 불혹 넘겨 용감무쌍하게 새 길 찾아 떠나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부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부터 앞서는 게 사실. 특히 지금껏 쌓아온 커리어가 성공적인 이들이라면 더 더욱이 그렇다. 그러나 도전에 익숙한 이들에게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할 뿐 언제고 자신의 마음 속 소리를 좇아 꿈을 따라 길 떠날 준비가 돼 있다. 지금껏 그래왔듯. PGA 헤드프로 리오 김(55·leoniakim.com)씨 역시 그러하다. 성공적인 의류 사업가로 살아오다 40대 초반 PGA 클래스A 멤버에 도전, 젊은 남성 골퍼들도 힘들다는 자격증을 거머쥐었다. '포기란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라는 우스개 소리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그녀의 집념어린 10년 도전기를 들어봤다. #피아니스트에서 의류사업가로 서울 출생인 그녀는 예원예고 졸업 후인 1981년 이화여대 피아노과에 진학했다. 모교 대학원 재학 중 시민권자인 남편을 만나 결혼해 1985년 LA로 왔다. 1987년 USC 음대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LA다운타운에서 원단·의류사업을 하던 남편의 권유로 이듬해 FIDM에 입학했다. 졸업 후 남편의 사업체에서 일을 시작한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발군의 실력을 나타냈다. 그녀가 내놓는 디자인마다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대박을 친 것이다. 이후 사업은 더욱더 승승장구했고 90년대 중반 부부는 인도네시아에 현지공장을 건립해 사업체 확장을 꾀했다. 그렇게 인도네시아로 사업기반을 옮길 무렵 여유 시간이 생긴 그녀는 모친의 권유로 골프를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워낙 바쁘게 살아 골프장 근처에 가본 적도 없었죠. 그런데 학창시절 체육부장을 도맡아 할 만큼 운동에 소질이 있어서 그랬는지 시작한 지 1년 반쯤 지나니 싱글을 치게 되더라고요." 이후 그녀는 각종 로컬 골프대회 우승을 휩쓸며 아마추어 골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매일 하루 5~6시간씩 연습에, 1주일에 꼭 2~3번은 라운딩을 했고 개인레슨도 꾸준히 받았어요. 돌이켜보면 골프에 미쳐 산 셈이죠.(웃음)" 이런 무시무시한 연습량 덕분에 그녀는 골프 입문 5년 만에 프로 골퍼들에게도 드물다는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렇다고 거기서 연습을 멈출 그녀가 아니다. "의사는 아예 연습을 하지 말라 했는데 그래도 연습장에 나가 풀스윙은 못하고 퍼팅연습만 했죠. 제가 가만히 있는 성격이 못돼요.(웃음)" #PGA 클래스A에 도전하다 이후 그녀는 저소득층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골프레슨 봉사활동을 하면서 골프 레슨에 대한 재능과 즐거움을 발견하게 돼 PGA 티칭프로에 도전한다. "가르치는 게 적성에 맞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왕 시작한 거 전문가가 돼 보자 싶어 PGA 클래스A 멤버에 도전하기 했죠. 주변에서 다들 뜯어 말린, 어찌 보면 무모한 도전이었죠.(웃음)" PGA 티칭프로가 되기 위해선 PGA 클래스A 멤버 자격증을 따야하는데 PGA 클래스A 멤버 자격증은 단순히 티칭프로 뿐만 아니라 골프클럽 운영부터 코스 디자인, 대회운영 등 골프 전반에 관한 이론 및 실무 능력 테스트까지 통과해야만 취득할 수 있는 자격증. 거기다 대학졸업과 맞먹는 최소 4~6년의 시간과 1만5000~2만달러의 비용이 소요되는데다 총 응시자의 15% 내외만이 최종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어 자격증 취득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 특히 자격증 취득을 위해서는 골프클럽에 취직해 실무 경험을 쌓는 것은 필수다. 그러나 중년의 동양인 여성을 써주겠다는 골프클럽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클럽 매니저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골프클럽에서 8시간을 기다려보기도 하고 50번 넘게 이력서를 내고 인터뷰도 했지만 번번이 떨어지기 일쑤. 지금껏 피아니스트로, 성공한 사업가로 탄탄대로만을 걸어왔던 그녀였기에 좌절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싶었다. "맞아요. 이 자격증을 따느라 보낸 10년간 인생 공부를 다시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골프클럽에서 캐시어부터 일하면서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사회경험을 하면서 겸손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배우게 됐죠. 자격증보다 그게 더 큰 소득이 아닌가 싶어요." 이후 오전엔 골프클럽에서 일하고 퇴근 후엔 공부하느라 새벽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일상이 수년간 이어졌다. 덕분에 좌우 2.0이던 시력은 뚝 떨어져 안경까지 쓰게 됐을 정도. 이처럼 독하고 끈질기게 공부에 매달린 끝 드디어 그녀는 지난해 3단계 최종시험을 통과하고 PGA 클래스A 멤버가 됐다. "합격 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죠. 그 10년간 가족과 친구들이 뭐가 부족해서 그러느냐며 말린 외로운 싸움이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온 제 자신이 정말 대견스러웠으니까요." #꿈은 이뤄진다 현재 그녀는 3년 전부터 일하고 있는 실마 엘카리소 골프코스(elcarisogc.com)에선 헤드프로로, 글렌데일 숄캐년 골프클럽(schollcanyongc.com)에선 티칭프로로 근무하며 초등학생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녀의 꼼꼼하면서도 전문적인 레슨에 반한 수강생들의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올 여름엔 주니어 캠프를 맡아 가르치며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인터뷰 도중 그녀의 셀폰엔 문자 수신 알림음이 연신 울려댔다. 주로 수강생들에게서 오는 메시지들인데 그녀가 그 중 한 개를 보여줬다. "70대 백인 시니어신데 40년간 골프를 쳤는데도 점수가 100타 밑으로 떨어지지 않아 제게 왔는데 레슨한 지 반년도 채 안 돼 싱글이 됐다고 너무 좋아하네요. 가르치는 게 힘들다가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날아갈 것 같아요.(웃음)" 그래서 인지 그녀의 수업은 제 시간에 끝나는 법이 없다. "제 성에 차지 않으면 수업을 끝낼 수가 없어요. 주변에선 사서 고생한다고 하는데 어쩌겠어요. 잘 가르치고 싶어 티칭프로가 된 거 이왕이면 하나라도 더 잘 가르쳐줘야 직성이 풀리는 걸요.(웃음)" 현재 글렌데일 한 성당에서 반주자로 봉사하고 있는 그녀는 최근 전문가에게 3년간 실용음악을 지도 받았는데 조만간 실용음악 합주단을 꾸려 불우이웃들을 위한 연주공연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참 재주도 많다는 생각이 스칠 찰나, 천재도 노력하는 사람은 못 이긴다는 케케묵은 글귀 한 줄이 스쳤다. 그리하여 흉내조차 불가해 보이는 그녀의 노력과 집념이 만들어 낸 지금의 그린 위 모습이 참으로 근사해 보였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7-11-19

[인물 오디세이] 코파비다 카페 스티브 장 대표…한 잔의 커피, 한 잔의 삶을 나누다

불우이웃·태풍피해 돕기 등 꾸준히 사회환원·기부 활동 "하고 싶은 일 도전하면 삶의 의미·목적은 따라와" 굳이 링컨의 명언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중년 이후 얼굴은 참 많은 걸 '누설'한다. 한 사람이 살아온 역사랄까 이력서랄까가 그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말이다. 그를 첫 대면했을 때 첫인상은 마음씨 좋은 '교회 오빠'였다. 이후 당연하게도 합리적이고 실력 있는 사업가의 모습도 그 위로 스쳐갔다. 그러나 대화가 깊어질수록 그의 얼굴엔 지금껏 좋은 삶을 살고자 했던 한 청년의, 한 가장이 모습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바로 최근 떠오르고 있는 스페셜티 커피전문점 코파비다(Copa Vida) 스티브 장(47) 대표다. 제법 쌀쌀해진 가을 아침, 달콤 쌉사름한 커피향이 알맞게 유영하는 패서디나 카페에서 그를 만나봤다. #변호사 꿈 접고 분쟁조정관 되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 1978년 LA 다우니 인근으로 가족이민 온 그는 워렌고교를 졸업하고 캘폴리포모나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초등학교 시절 참 많이 힘들었죠. 인종차별로 인한 불합리한 상황이 생겨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를 해결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때마다 마음 속으로 나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죠." 그런 유년시절 경험 때문에 그는 약자를 대변해주는 변호사를 꿈꾸며 대학 졸업 후 법대에 진학했다. 법대 입학을 앞두고 1994년 그는 아태분쟁조정센터(APADRC)에서 분쟁조정관(mediator)으로 일했는데 그곳에서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게 된다. "대학시절 4·29 LA폭동을 겪으면서 한흑 커뮤니티 간 중재의 필요성을 절감해 커뮤니티 봉사를 시작했죠. 그런데 당시 센터 내 변호사가 승자와 패자만이 존재하는 법정보다는 양측 모두에게 해법을 제시하는 분쟁조정관이 제게 더 잘 맞는 것 같다고 권유해 센터에 남았죠." 그래서 그는 법대 입학을 포기하고 LA검찰청이 제공하는 분쟁조정관 교육프로그램을 이수, 공인 분쟁조정관 및 공인 분쟁조정관 트레이너격증을 취득했고 1998년엔 센터 소장으로 승진해 인종 간 혹은 커뮤니티 간 분쟁조절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했다. 또 그곳에서 만난 아내와 결혼, 두 딸을 두고 있다. 1998년 UCLA대학원에서 도시계획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1999년 LA카운티 인간관계위원회(LACCHR)로 이직, 시니어 컨설턴트로도 근무했다. #사업 경영에 뛰어들다 그렇게 커뮤니티를 위해 일하는 것이 천직이라 믿었던 그에게 다시 터닝 포인트가 찾아온다. 당시 미국 내 유명 체인 레스토랑에 에그롤피와 아시안 국수 등을 납품하는 유명 식품업체인 윙힝국수(Wing Hing Noodle Company)를 25년간 운영해오던 장인이 암 진단을 받으면서 그에게 경영참여를 부탁한 것이다. 고심 끝 그는 2001년 장인의 회사에 입사, 사업체 경영이라는 새로운 커리어에 도전한다. 이후 회사는 빠르게 성장해 공장을 3곳으로 확장할 수 있었고 사업품목도 일식국수를 비롯 이탈리안 푸드로까지 확장하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대학 졸업 후 10년 가까이 분쟁조정 전문가로 일해 왔던 그가 경영자로 변신한 것도, 이후 일군 사업적 성공도 신기하다 했더니 그가 웃는다. "그런가요? 이민 후 부모님께서 포토숍에서부터 가발가게 등 다양한 사업을 했는데 당시 저도 가게에 나가 일을 도왔죠. 그러면서 중학생 때부터 사업에 대해, 특히 고객서비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경영이라는 게 결국 사람 간 혹은 조직 간을 중재하는 일에 다름 아니거든요. 의도한건 아니었지만 분쟁조정관으로서의 경력이 사업하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된 셈이죠." 그렇게 잘나가는 사업체였지만 그와 경영진은 2011년 회사를 매각했다.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패밀리 비즈니스만으론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고 경영에 참여하고 있던 처가식구들도 2세 경영의 한계를 느껴 논의 끝 매각을 결정하게 됐죠." #커피에 미치다 사업매각 후 그가 창업 아이템으로 삼은 건 커피숍. "그 무렵 전문경영인에게 앞으로 뭘 하면 좋을지 자문을 구했더니 좋아하는 걸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족과 신앙, 야구 다음으로 제가 좋아하는 게 커피 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그는 1년간 유럽과 일본, 남미 등을 여행하며 본격적으로 커피와 커피숍 운영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특히 코스타리카 커피농장에서 운영하는 커피학교에 들어가 커피 수확부터 로스팅, 바리스타 공부까지 마쳤다. 그리고 그때 코파비다라는 커피숍 이름도 지었다. "코파비다는 스패니시로 한잔의 라이프(cup of life)라는 뜻인데 인생을 커피처럼 나누자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커피만 파는 공간이 아닌 그 속에 문화가 있고 사람들 간의 소통이 있는 인생 공간을 만들고 싶었죠." 그리고 2012년 패서디나 올드타운에 코파비다 카페(copa-vida.com)와 로스팅 컴퍼니를 오픈했다. 처음 몇 달은 고전했지만 카페는 조금씩 동네 주민들에게 사랑받기 시작했고 1년쯤 지나니 주말엔 앉을 자리가 없을 만큼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후 코파비다는 이터LA, LA위클리, LA매거진 등 유명 매체가 뽑은 'LA 베스트 커피숍 톱10'에 이름을 올리면서 명실상부 LA를 대표하는 스페셜티 커피숍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3년 뒤인 2015년 샌디에이고 2호점을 필두로 샌디에이고에만 3곳의 지점을 오픈했고 칼스배드에도 브랜치를 냈다. 또 내년엔 LA카운티에 2곳을 더 열 예정이라고. 그러나 무엇보다 코파비다가 지역사회 주민들에게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는 나눔의 정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기 때문. 오픈 후부터 지금까지 그는 LA아동병원을 비롯 굿네이버스, 저스티스라이징 등 비영리단체에 해마다 적잖은 금액을 기부해왔고 지난 8월엔 '라테 콘테스트'를 열어 수익금 전액에 매칭펀드를 더해 텍사스 허리케인 피해자들에게 8000달러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말한다. 그저 마음의 소리를 따라오다 보니 이곳에 이르게 됐다고. 남 보기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온 것 같은 그도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불안했고 나중에 후회할까봐 걱정도 했지만 삶의 목적을 따라 걷다보니 이곳에 이르렀다고. 그리하여 그는 젊은 세대를 향해 걱정하느라 시간만 보내기 보단 하고 싶은 일을 실천에 옮기라 주문한다. 움직이는 공이 방향성을 가지듯 도전하다 보면 삶의 의미와 목적도 함께 따라오게 된다고.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7-11-12

[인물 오디세이] ABC 상담대화교육원 여명미 대표 "받은 축복 나누는 삶 살고 싶다"

봉사 위해 의사직 58세 은퇴 ABC상담대화교육원 설립 "많은 분들의 도움 잊지 못해 나누며 살아야 진짜 행복한 삶" 호모 헌드레드(Homo-Hundred) 시대를 맞아 너나 할 것 없이 인생 2막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러나 먹고 살기 바쁜 인생 1막을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떠밀리듯 올라간 2막 무대 위 조명이 켜지는 순간 머릿속은 아득해지기만 하다. 왜 아니겠는가. 세상은 2막 배우들에게 청년처럼 살라고 부추기지만 대개의 경우 아무 준비 없이 얼떨결에 오른 2막 무대 위의 그 두려움은 겪어보지 않고선 알 수 없을 터. 그러나 그 어렵다는 인생 2막을 1막보다 더 멋지게 살아가는 이가 있다. 바로 ABC 상담대화교육원 여명미(74) 대표다. 50대 후반, 어찌 보면 조금 이른 나이에 의사 가운을 벗고 대화 전문가로 활발한 행보를 이어가는 그녀를 만나봤다. #OC 한인 개업의 2호 6남매 중 장녀인 그녀는 경기여고를 거쳐 1961년 이화여대 의대에 입학했다. 졸업 후 서울대학병원에서 인턴 수련을 마치고 1968년 뉴욕주로 와 작은 시골마을 트로이의 종합병원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녀는 정신의학과 전문의 여천기(77) 박사를 만나 결혼했고 시카고 종합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임상해부병리학과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했다. 1973년 가주 의사면허증을 취득한 그녀는 UC어바인 대학병원에서 임상강사로 재직하면서 다시 가정의학과 전문의 공부를 시작해 3년 뒤 자격증을 취득했다. 당시 세 살배기 막내아들까지 어린 삼남매를 키우면서 전문의 면허를 두 개나 딴 것이다. "애들 셋 키우며 자격증 시험 준비하는 일이 만만치는 않았죠, 출근길에 애들 맡기고 퇴근해 다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그 시절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네요.(웃음)" 1977년 샌타애나에서 개인병원을 오픈한 그녀는 오렌지카운티 한인 개업의 2호다. 이후 1985년 오렌지시티로 병원을 이전한 뒤 은퇴할 때까지 쭉 그곳에서 진료해 왔다. #시련 넘어 대화·상담 전문가로 이처럼 평화로워 보이는 그녀의 일상에도 시련이 찾아왔다. 당시 그녀는 한국에 있던 가족을 모두 미국으로 초청했는데 1980년대 초반 온 가족이 나선 여행길에서 여동생이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우울증이 있었던 여동생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후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죠. 의사가 되서 여동생이 그렇게 될 때까지 뭘 했나 싶은 자괴감으로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죠." 순간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안경너머로 눈물이 떨어진다. 4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에겐 여전히 어제 일처럼 생생한 아픔이리라. "이후 신앙을 통해 시련을 극복하면서 주류사회의 각종 부부·가정 문제 관련 세미나 및 교육과정을 쫓아 다니며 배우기 시작했어요. 불행했던 부모님의 부부관계로 가족 모두가 행복하지 않았고 여동생의 우울증도 이런 가정환경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그러면서 그녀는 다니던 교회에서 가정문제 세미나를 진행하는 등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1990년부터는 OC가정법률상담소 부이사장직을 맡아 상담 및 교육을 진행했다. 그러다 그 무렵 부부싸움으로 인한 한인가정 내 총기사건이 잇따라 터지자 그녀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셸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위해 3년간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 1993년 오렌지시티에 '푸른 초장의 집'을 오픈해 10년간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또 1990년대 중반 OC검찰청의 의뢰로 한인 가정폭력 가해자 및 피해자를 대상으로 하는 부부 및 부모 대화교육 강사로도 3년간 활동했다. "원래 가정폭력 사건이 접수되면 이런 교육을 이수하는 게 의무화 돼 있는데 OC 한인사회에는 한국어 교육이 없다보니 제게 의뢰가 들어 와 시작하게 됐죠. 그리고 그 교육을 통해 변화하고 회복되는 부부나 가족들을 보면서 가족 간 대화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게 됐습니다." 이후 그녀는 본격적으로 주류사회 각종 기관에서 운영하는 대화상담, 심리치료, 아동학대방지 등과 관련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 그간의 연구와 세미나 등을 묶어 '이런 대화가 삶을 바꾼다'란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나누며 사는 행복한 삶 이처럼 10년간 의사로, 상담자로, 교육자로 분주하게 살던 그녀는 2000년 병원 문을 닫고 은퇴했다. 당시 그녀 나이 58세. 다른 의사들의 은퇴연령과 비교하면 좀 이르다 싶었다. "그 무렵 3남매 다 키워놓고 나니 이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생각해보니 가르치는 것, 그중에서도 대화교육이더라고요. 무엇보다 이 일을 언제까지고 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을 리더로 키워놓으면 그만큼 보람 있는 일이 없겠다 싶었죠." 그래서 그녀는 2002년 신학교에 진학, 가정사역자 과정을 시작했고 2007년 ABC 상담대화교육원을 설립했다. 그동안 교육원에서 배출한 대화교육 강사는 타주 및 해외 한인들까지 합쳐 약 20여명. 강사교육 외에도 교육원에선 정신질환자 가족들을 위한 세미나와 부부·부모교육도 진행 중인데 내년부터는 암환자 서포트그룹 및 재소자 상담, 출소자를 위한 사회적응 프로그램도 운영할 계획이다. 특히 그녀는 부모·자녀 간 대화법에 관심이 커 이와 관련한 세미나 및 교육이라면 열일 제쳐놓고 나선다. "아이들 키울 때 두 딸들은 제가 시키는 대로 잘 따라 왔는데 막내아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부모와 대화도 잘 안하고 공부도 게을리 하는 것 같아 애를 먹었죠. 이후 아들을 고쳐보겠다고 대화법을 공부하다 결국 아들을 고치는 게 아니라 제가 변화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고 시간이 걸렸지만 이후 저희 가족들도 진심으로 통하는 사이가 됐죠." 이런 그녀의 열린 마음과 열성적인 교육 덕분에 삼남매는 모두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지금은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이처럼 평생에 걸쳐 본업을 제쳐두고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제가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그 빚은 갚고 죽어야 할 것 같아서요.(웃음) 그리고 물이 고이면 썩듯 받은 축복을 끼고만 있으면 안 될 것 같기도 했고요. 나누며 살아야 진짜 사는 재미가 있으니까요." 이렇게 아름답게 나이들 수 있다면 좋겠다.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온 연륜을 나누며, 무엇보다 고난과 고통 속을 헤매는 이들의 상처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며.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7-11-05

[인물 오디세이] 힐스 한의원 류후기 원장, 행복은 나눌수록 더 커진다

북경중의대 졸업 후 도미 밸리·리버사이드서 개원 유학생·형편 힘든 환자 무료진료, 약도 나눠줘 라티노 사회서 의료봉사, 아들과 해피빌리지 활동도 "가진 재주 다 쓰고 가고파 나눔통해 진정한 행복 배워" 행복하게 산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무한경쟁, 그 속도전 속 밥벌이의 고단함과 불투명한 미래가 켜켜이 쌓여 그저 하루하루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21세기 현대인들에게 행복은 무지개 저편 어디쯤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지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언젠가 그 무지개 너머 파랑새를 찾으면 행복해질 것이라 믿으며 오늘도 부지런히 그 무지개를 향해 걷는다. 그러나 그 행복으로 가는 문의 열쇠를 이미 손에 쥔 이들은 말한다. 파랑새는 무지개 너머가 아닌 바로 지금 내 곁에 있다고. 힐스 한의원 류후기(53) 원장 역시 그러했다. 유쾌하고 청년 같은 삶을 사는 그를 만나 그 행복의 비밀을 엿봤다. #늦깎이 한의대생 안동 출생인 그는 대학 재학 중 군복무를 마치고 부친의 사업을 돕다 우연한 계기로 한의대에 진학하게 됐다. "친한 선배가 한의사였는데 저보고 한의사가 적성에 딱이라며 한의학을 공부해 보면 어떻겠냐 하더라고요. 당시 저는 부친 사업과 관련해 러시아 유학을 준비 중이었는데 러시아내 정치적 상황으로 유학이 무산되면서 중국어 공부를 시작해 1년 뒤 중국 유학길에 올랐죠." 1994년 북경 중의대에 입학한 이 늦깎이 유학생의 한의대 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언어적 한계와 어마어마한 공부 량을 쫓아가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1년 만에 몸무게가 10kg나 빠졌을 정도니까요. 게다가 졸업 때까지 위장염을 달고 살았어요. 덕분에 졸업 무렵엔 위장병에 있어선 전문가가 됐지만요.(웃음)" 하루 8~10시간이 넘는 수업과 주말에도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빡센' 강행군 끝 그는 2001년 대학을 졸업했고 이후 석사과정을 시작하면서 중의대 병원에서 근무했다. "대학병원 근무 때 참 행복했어요. 당시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아파트에 살면서 언어가 안 통하는 한인들을 진료해 주고 병원 통역도 해줄 수 있어 한의사가 된 보람이 있었죠." 그러다 2003년 세계를 공포에 빠뜨린 사스가 발생하면서 병원 당국은 외국인 의료진들에게 귀국 명령을 내렸다. "원래 석사과정 마치고 한의대 재학시절 친해진 일본인 내과의 제안으로 일본에서 양한방 병원을 함께 개원할 예정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한국으로 귀국하게 돼 쉬는 동안 미국에 오게 됐죠." #유학생들을 돕다 2004년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LA에 온 그는 사우스베일로 한의과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이듬해 가주 한의사 자격증을 따 LA한인타운에 '류 한의원'을 오픈했다. "이왕 시작한 공부, 면허는 따자 싶어 있다 보니 아이들도 이곳 생활에 적응하게 되면서 결국 여기에 터를 잡게 됐죠. 그리고 당시 주류사회에서 한방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던 차라 블루오션을 개척할 수 있겠다는 비전도 생겨 귀국을 접고 개원하게 됐습니다." 특별한 홍보도 없이 주로 입소문을 듣고 온 환자들을 진료하던 그가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한 것은 2010년 캘스테이트 노스리지(CSUN) 인근에 힐스 한의원(Hills Acupuncture Clinic)을 오픈하면서부터. 당시 환자들 중엔 지역 특성상 한국인 유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겐 무료 진료는 물론 무료로 한약도 나눠주면서 유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났죠. 남의 나라에서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인데 아프기까지 하면 더 서럽잖아요. 특히 저처럼 스트레스성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학생들은 더 안쓰러워 모른 척 할 수가 없었어요. 저 역시 유학시절 위장병으로 고생해 그 고통을 너무 잘 아니까요." 또 보험도, 돈도 없는 환자들이 전문의 진료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서면 친구 의사들에게 전화해 상황을 설명하고 진료를 부탁하기도 했다. 돈 되는 일도,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참 오지랖(?)도 넓다했더니 그가 웃는다. "오히려 환자들에게 받은 마음이 훨씬 커요. 유학생들의 부모님들이 이야기를 듣고 제게 갖다 주라며 한국에서 들기름 한 병을 보내신 적도 있고 양말까지 싸서 보내기도 하니까요. 그 마음이 너무 감사하죠." 이후 그의 환자였던 한인 교수가 UC리버사이드로 자리를 옮기며 그에게 인근 한인들의 왕진을 부탁해 리버사이드를 오가다 2013년 아예 UC리버사이드 인근에도 분원을 오픈했다. 그래서 그는 2년 전까지 총 3곳의 한의원을 운영하다 지금은 한인타운을 제외한 두 곳만 운영 중이다. #봉사는 행복의 원천 이처럼 LA와 리버사이드, 밸리를 오가는 분주한 스케줄 중에도 그는 다양한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2007년부터 출석 교회 의료봉사팀 팀장을 맡아 수년간 교인들을 진료한 걸 시작으로 3년 전부터는 라티노 커뮤니티 비영리단체인 WCLO와 인연이 닿아 사우스LA에서 격주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또 이 단체가 LA다운타운에서 개최하는 헬스엑스포 및 라티노 커뮤니티의 또 다른 봉사단체가 주관하는 저소득층에 음식 나눠주기 행사도 빼놓지 않고 참가하고 있다. "어차피 제 직업 자체가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니까요. 갖고 있는 재주는 다 쓰고 살다 가려고요.(웃음) 그리고 환자를 진료하고 누군가를 도와주는 순간만큼 행복할 때가 없으니 제가 받은 행복이 훨씬 더 큰 셈이죠." 또 그는 2015년 당시 8학년이던 아들이 시작한 중앙일보 산하 비영리봉사단체인 해피빌리지의 각종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처음엔 아들 라이드를 해주려 간 것이었는데 간 김에 조금씩 일을 돕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웃음)" 그래서 그는 2년 넘게 아들과 함께 LA인근 공원 청소부터 글렌데일 소녀상 청소, 사랑의 마라톤 지원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가하면 그는 재미대한산악연맹의 의료봉사팀에서도 활동 중이다. "등산 사고는 주로 암벽등반 시에 발생하기 때문에 지난해 아예 등산학교 암벽등반 코스를 수료했어요. 그래야만 일반 등산뿐만 아니라 암벽등반 때도 동행할 수 있으니까요. 뭐 봉사라기보다는 저 좋아 하는 일이죠.(웃음)" 그러면서 그는 은퇴 후엔 보다 더 본격적으로 의료봉사 활동을 하고 싶다했다. "현재 아내도 한의학 공부 중입니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은퇴 후 아내와 함께 의료봉사를 할 수 있다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순간 그의 얼굴에 소년 같은 미소가 번진다. 생각만 해도 좋은가 보다. 그 미소 속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걸 본 듯도 싶었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7-10-29

[인물 오디세이] 로열비즈니스 뱅크 랄슨 리 전무…맨발의 풋볼 키커, 성공신화를 쓰다

3년 전 현 은행에 스카우트 주택융자부 신설, 고속 성장 의료선교·봉사활동도 열심 "받은 도움 돌려주고 파" 처음 만나는 사람을 단박에 무장해제 시킬 수 있다는 건 참 대단한 재주다. 로열비즈니스 뱅크 랄슨 리(58·한국명 이현택) 전무(EVP)도 그러하다. 이런 신기한 재주를 가진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 스스로 처음 본 상대에 경계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랬다. 오랜 시간 금융인으로 살아온 이들 특유의 딱딱함보다는 맘씨 좋은 옆집 아저씨의 소탈함이 앞섰다. 물론 경청과 질문사이, 찰나의 예리한 눈빛과 전문지식을 알기 쉽게 풀어놓는 본새를 보고 있노라면 더 묻고 따질 필요 없이 그의 성공의 이면을 짐작케 했지만 말이다. 가는 여름에 아직도 미련이 남은 양 불볕더위가 작열하던 한낮, LA다운타운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봤다. #NFL 키커를 꿈꾸다 서울 출생인 그는 열두 살 때인 1971년 북가주 몬터레이로 가족이민 왔다. 한인은 물론 아시안도 거의 없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소년의 미국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암묵적 혹은 명백한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다보니 학교에선 매일 싸움박질의 연속이었다. 결국 1년 뒤 학교 측의 전학권고를 받고 하와이로 이주해 학교를 옮겼다. 다행히 전학 후 학교생활은 안정을 되찾았고 8학년부터는 교내 육상클럽에서, 12학년 때는 교내 풋볼팀에서 키커로 활약하며 스포츠에 두각을 나타냈다. "고교 졸업 후 미군에 입대하려 했어요. 그런데 우연히 NFL 코치 출신인 대학팀 감독이 제 경기 영상을 보고 전액장학금을 제시하며 입학을 권유했죠." 그래서 1978년 그는 샌디에이고 소재 US인터내셔널 대학교 수학과에 진학해 대학 풋볼팀 키커로 활약했다. 그러다 2학년 때 팀이 해체되는 바람에 그는 하와이주립대 풋볼팀으로 스카우트됐다. 그곳에서 그는 좋은 기량을 선보이며 '맨발의 키커'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고 대학 졸업 후인 1983년 NFL 필라델피아 이글스에 입단할 수 있었다. "당시 NFL 첫 한인 선수였을 겁니다. 물론 입단했다고 모두 정식 선수가 되는 건 아닙니다. 함께 입단한 100여명 중 프리시즌을 거쳐 살아남는 선수는 절반도 안 되니까요." 예상대로 NFL 벽은 높았고 입단 후 프리시즌에서 단 한 경기 출장 후 방출됐다. 이후 그는 신흥 풋볼리그인 USFL 덴버 골드를 거쳐 NFL 덴버 브롱코에도 입단했지만 번번이 방출당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방출되면 취직해 생계를 이어갔고 열심히 다음 기회를 노렸다.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쯤 되면 포기할 법도 싶었다. "제가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에요.(웃음) 시작했으니 끝을 보고 싶었죠. NFL 전체 키커 수가 32명인데 설마 그 안에 못 들겠냐는 배짱이 있었던 것 같아요." #주택융자로 일군 성공 1987년 결혼과 동시에 그는 당시 막 발족한 실내 풋볼리그(AFL)의 피츠버그 글래디에이터스에 입단해 1년간 활약했는데 그해 준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맛보기도 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시즌을 끝내고 휴가차 LA에 온 그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게 된다. "당시 모기지 회사를 운영하던 지인께서 영어를 잘 하는 직원이 필요한데 쉬는 동안 함께 일해 보자 제안을 했죠. 당시 첫애가 막 태어났던 때라 가장으로서 책임감도 컸기에 일단 한번 해보자 싶었죠." 그때까지 운동만 하며 살아온 그에게 융자업무는 만만치 않았다. "처음엔 한국말도 제대로 못했으니 너무 힘들었죠. 그런 저를 신윤진 부사장을 비롯해 참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습니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전 없었을 겁니다. 정말 감사하죠." 운동으로 다져진 승부근성과 타고난 분석력 덕분에 그는 빠르게 업무에 적응했고 얼마 안가 수입도 크게 늘었다. 결국 반년 뒤 그는 풋볼팀 복귀를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주택융자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4년 뒤인 1991년 그는 신 부사장이 설립한 모기지 융자업체에서 함께 일하다 1995년 워싱턴뮤추얼 은행 주택융자부로 스카우트 돼 홀세일 매니저로 근무했다. 당시 주택 호경기를 타고 2000년대 초반, 그는 연간 10억달러에 가까운 매출을 기록하며 은행 사보에 화제의 인물로 소개되기도 했다. "고객 중 한인 모기지업체들이 많았는데 그러다보니 당시 남가주 한인 주택구입자의 25%가 저를 통해 융자를 했더라고요. 당시 주택구입자면 융자계약서에서 제 이름을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웃음)" #나누며 사는 삶 이후 그는 BoA를 거쳐 2010년부터 태평양은행에서 근무하다 2014년 중국계 은행인 로열비즈니스 뱅크로 스카우트 됐다. 이직 당시엔 주택융자부가 없었는데 그가 직원 4명을 데리고 팀을 꾸려 시작한 것이 3년 만에 28명으로 늘 만큼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한인, 중국인 등 이민자들에게 꼭 맞는 융자상품을 개발해 선보인 덕분에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덕분에 매출액도 매년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고 그 여세를 몰아 은행은 지난 7월 나스닥에 상장됐다. 당연히 그의 커미션만도 상당할 것 같았다. "아니에요. 지금은 월급제로 일합니다. 물론 커미션을 받으면 돈이야 많이 벌겠지만 커미션에 욕심내다 보면 직원들 키워줄 수도 없고 팀도 제대로 운영할 수 없겠다 싶어 처음부터 샐러리로 받겠다했죠." 이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그렇다고 그가 외골수 워커홀릭은 아니다. 그의 청춘을 뜨겁게 달궜던 풋볼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여전해 거주지인 하시엔다하이츠 한인들 10여명과 풋볼클럽을 조직해 매주 월요일이면 함께 모여 TV로 풋볼 경기를 관람하고 관전평도 나눈다. 그리고 모교인 하와이대 풋볼팀이 LA인근으로 원정경기를 오면 클럽 회원들과 경기장을 찾고 후배들을 위한 후원행사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봉사활동도 열심이다. 연세대치대동문회 소속 치과전문의 4명, 봉사자 8명 등과 함께 3년 전부터 멕시코 빈민촌을 찾아 의료선교를 해오고 있다. 그런가하면 LA카운티셰리프 한미경찰위원회에 소속돼 25년째 봉사활동도 이어오고 있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오늘에 이르렀으니 받은 걸 되돌려 주려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즐겁고 행복해서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문득 행복이 뭐 별건가 싶었다.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을 내일을 남들처럼 복닥거리며 살다 그 사이사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손을 외면치 않고 잡아주는 것, 그리하여 서로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꽤 근사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2017-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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